
해랑 | @R_will_H
몽상가
까마귀 울음이 넘어가는 흐느낌 같다. 그들이 날갯짓하면 누더기 숲은 단조로운 바람에 이끌려 비스듬히 기울어진다. 희뿌연 숨결이 지긋한 이가 남긴 걸음의 흔적을 따라 동향을 이끌자 겹쳐진 물안개가 늘어진 나뭇가지와 엉켜 억센 매듭을 짓는다. 무거운 걸음에 짓이겨진 마른 수초에서 서늘한 소독약 냄새가 난다. 인류의 빛은 기색이라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인색하고, 순수한 것은 속이 훤히 비치도록 맑아 구성지게 자라난 본잎이나 길 잃은 너구리 따위를 집 안으로 들인다. 애초의 만남이 있던 흰 문에서부터 흙바닥에 곧지 못하게 난 골이 깊다. 어두운 물속에서 뻐끔거리는 물고기는 파면이 일렁이는 찰나에만 척추를 희게 빛낸다.
***
눈꺼풀 너머로 불그스름하게 둘린 빛무리가 눈부시지 않게 번졌다. 나긋하게 늘어진 몸이 뻐근했으나 무겁지는 않았다. 시답잖은 책 두어 권이 얹어진 목제 테이블과 색이 바랜 녹색 기둥, 시대상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단정한 손에 잡힌 흑연이 몰스킨 수채화용 앨범 위를 스치며 사각거렸다. 귓바퀴를 돌아 들어오는 소리가 꽤 무뎠다.
소문 없이 쌓였던 먼지들이 손짓도 아닌 증명의 잔존에 의해 휘어진 가지처럼 허공에 나부꼈다. 앞자리에 앉은 이의 정장 아래로 희게 마른 오른발이 차갑게 언 바닥에 닿아있었다. 그 선족을 내려다보면 어떤 수도회에서 신을 따라나선 순례자가 떠올랐다. 윌이 이제 막 기색이 돌아와 침침한 시야를 어림하느라 연기를 마시듯 들숨을 삼켰다. 낡은 채로 폐부를 가득 메우는 냄새가 익숙했다. 머리 뒤편에 걸린 그림자가 나직하게 흔들리는 블라인드에 덧씌워져 어른거렸다. 윌은 갓 잠이 깨 더운 기운이 남은 손바닥으로 볼을 문질렀다.
내가 얼마나 잔 거죠?
꽤 오래요. 적어도 새벽은 지났어요.
그가 앨범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손목을 중심으로 그어진 나선이 낮게 내리깐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선의 집합. 빳빳한 종이는 늦가을에 강가의 산기슭. 희게 파하는 빛을 물고 날개를 덜 펼친 암갈색의 딱정벌레. 보이지는 않아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윌은 그에게로 다가가 그림을 살피는 대신 이전에도 같은 앨범을 잡았을 사람을 생각했다. 한 세기가 지나도 암울하거나 잡스러운 소음은 사라지지 않고 쉽게 늘어만 갔다. 그중에서도 장결한 자리에서 늦게 생한 자는 더욱 밝은 광채를 머금는 법이라. 그렇다면 관념을 잃어버리고 흔들리는 소망을 정당하다 할 위인은 여럿 가운데 몇이나 되는가? 윌은 앉은 자리에서 앨범을 쥔 이의 어깨선을 바라보았다.
깨우지 그랬어요.
지루하지 않았거든요. 무엇보다 당신이 피곤해 보였습니다.
그는 가름끈 대신 잡고 있던 코이노어 4B 연필을 앨범 중앙에 올려 마지막 페이지를 표시했다. 삼나무로 만든 연필 껍질이 검었다. 그가 간결한 움직임으로 가죽이 꿰매진 하드커버를 덮자 일어난 바람결이 공중을 떠돌던 가느다란 빛 파편들을 불규칙하게 흔들었다. 따뜻한 생이 근거하고 원초적인 안식이 자리 잡은 곳. 그의 영토는 줄곧 고요했으며, 바깥에서도 훤히 드러났다. 우선 좀 걸을까요. 그는 테이블에 걸쳐져 있던 우산을 집어 들었다.
***
길은 없었다. 규칙적인 진동을 울리는 바닥은 허황한 것이 섞이지 않아 윌의 맨발바닥이 집힐 때마다 물결이 일어나 자취를 남겼다. 파문은 얼마 가지 못하고 박동에 못 이겨 사그라들었다. 기울어짐 없이 늘어지는 짜임새가 자못 마음에 들었다. 가슴께를 감싸는 공기가 서느렇게 머물렀지만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오늘은 바래다주겠다 권하지 않을 건가요?
나중에요.
당신의 지금은 나중이나 다름없어요.
언제나 예외는 있습니다, 윌. 서쪽을 보세요. 별이 밝아요.
윌은 서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어두운 하늘에는 가죽에 실의를 덧댄 이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의 수면이 차게 굳어진 채 영한 공중에 성겼다. 해가 뜨려면 한참이 남은듯 했다. 허한 속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대로 계속 뱃가죽을 굶긴다면 정직한 낭설을 완전히 소화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중간하게 돌아오지 않는 현실감이 여전했다. 그러나 수지를 오므려 그 전부를 손에 쥐면 갓 터져 나와 살결에 말라붙은 붉신나무 열매의 색채가 분명하게 떠올라 불멸의 순응을 부추겼다. 손가락 사이에서 오래도록 어둡게 남은 생명의 결실을 언뜻 꼽아냈다. 윌은 느린 걸음을 잡으며 멀겋게 뜬 눈을 깜박였다.
…애비게일은 괜찮을까요?
그러길 바라요.
아무렴요.
괜찮을거에요.
저항하지 않더군요.
당신이 자유로워지길 원했으니까요.
이제와서요?
이제라도요.
윌이 찬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닮아 발그스레한 피부에 그녀의 아버지와 닮아 말끔히 이마에 붙은 머리칼의 부드러운 결이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살짝 올라간 끝이 앙증맞은 코와 똑 부러지게 조잘대던 입술. 옴폭하게 들어간 눈썹과 속눈썹 사이. 유선형으로 둥글게 뜨여 올리브의 낮은 호흡을 머금는 담청색 눈동자는 견고한 감이 있어 한 곳에 자주 쉬곤 했다. 윌은 차고 쓸쓸하게, 어쩌면 서늘하게 한순간을 기점으로 허공으로 향하던 시평선을 떠올렸다. 영영 애비게일을 위해 올린 기도를 떠올렸다. 마지막이 되어서는 기어이 마주하지 못한 그녀의 낯을 되뇄다.
누군가는 애비게일은 연쇄살인마의 교활하고 악랄한 공범이라 규정했다. 그렇지만 간혹 사고는 자각하지 않아도 일정한 작용에 의해 스스로 작동하기 마련이라, 원형 그대로의 초자아에 남의 어리석은 견해가 끼어들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윌은 그녀가 기색이 뜻하는 의미를 짚어내는 데에 익숙하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말을 건넬 때면 한 치 거짓을 담지 못하는 것이 윌의 버릇이었다. 문제는 없었다. 윌이 그녀를 다시 마주하는 세상이 오기 전까지는.
그녀는 생명을 장악하는 법을 배우며 벼랑에 섰을 때, 자신을 따르는 것이 우위를 차지하여 존중과 자만을 얻는 일임을 깨우쳤을 것이다. 윌은 이제 와 그녀가 자신의 애착 따위는 저버리고 평소같이 굴기를 애상에 길이 청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집스럽게도 애비게일은 올곧았고, 윌은 그녀에게 닿는 법을 몰랐다. 설익은 기억장치가 끊임없이 되풀이될수록 나은 결과가 오기는 배로 어려워짐을 윌은 알았다. 납득과 이해, 사이에 본능과 결핍.
그녀가 보고 싶었어요.
잘 지내길 바랐죠.
하지만 아니었잖아요.
제 탓을 하는 건가요?
나 때문이에요.
당신은 괜찮을 거예요.
목 뒤로 넘어가는 공기가 눅눅했다. 말을 마친 인영을 나아가는 윌의 걸음을 뒤쫓았다. 윌은 셔츠의 앞섬을 구겨지게 문지르며 금방이라도 마주칠 법한 눈길을 피했다.
***
파리한 하늘이 요동치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들고 있던 우산을 펼쳐 윌에게로 비스듬히 씌워주었지만 두 사람이 쓰기에는 좁았다. 구름에 가까운 습기 덩어리는 윌에게 변명하듯 공허한 소리를 뭉개듯 웅얼거렸다. 윌의 어깨가 차츰 젖어 들었다.
유년 시절을 기억할 수 있나요, 윌?
몇 가지는요. 보트 수리, 플라이낚시.
당신에게 온전한 안정감을 되찾아주던.
문득 윌은 걸음을 멈추고 눈을 반쯤 감으며 하잘것없이 가녀린 한숨을 내쉬었다. 윌은 가끔 물속에 손을 담그고 완류하는 강물에도 의지가 있다면 그는 어디로 떠나갈지 생각해보곤 했다. 보이지 않게 속에서 흐르면서 죽음과 생을 관장하는 이의 굳건한 신념. 던져진 이름은 물살을 타고 뒤집힐듯 출렁이다 아래로 잠겨 들어가면 윌은 낚시줄을 끌어당겼다. 손목이 채여 낚싯줄이 여린 살을 짓누르면, 그 끝에는 무엇도 달려있지 않음을 윌은 일찍이 눈치챌 수 있었다. 경직된 척추 선이 뻐근했다.
그걸 애비게일에게 알려주려 했는데.
이번에도 그러지 못했네요.
그게 큰 욕심이었나요?
당신이 충족하고자 했던 상실의 병폐였죠. 무의식을 구성하는 건 과거의 파편들이에요. 현재는 과거고, 미래는 예정되었을 뿐이니까요.
멍청한 소리네요. 과거가 어떻든 일어날 만한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어요.
하지만 이 또한 별것 아닌 기억들의 결실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에요?
윌이 퉁명스레 그를 흘겨봤다. 무심하게, 하지만 고르게 걸러진 낱말들이 자신의 거짓말을 탓하는 것 같았다. 세상은 윌이 없어도 흘러가고 이제 와서 선택의 나열 중 하나를 꼽아 잘못 계량된 옳고 그름의 양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잘못된 결과는 없었다. 책임을 묻는 말에 정당한 답을 내릴 사람도 없었다. 지나간 때를 되짚어, 낡아빠진 시골 편의점에서 훔친 물건은 윌에게 어떤 규범을 알려줬는가? 잠재된 성향은 사소한 자극으로 일깨워지기도 했다.
애비게일에게 있어 아버지라 함은 단순히 혈육이나 상대의 자원으로 건네지는 이름표 같은 지위가 아닌 상호작용과 유대의 결과물이에요. 당신이 화목한 가족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는 만큼, 그녀를 생각하는 만큼 그녀는 당신이 다가오길 허락했죠.
저는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는데요.
하지만 그녀의 편이었죠. 당신은 애비게일의 상실과 원망을 이해했잖아요.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랬을 거예요.
희멀건 하늘이 요동쳤다. 관계는 쇠약했고 윌은 폐부가 남보다 모자라게 팽창하며 꼬여 드는 간장을 느꼈다. 빠르게 눈을 깜박였지만 이미 목소리는 갈라져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줄어든 말수가 훤했다. 빠진 조각은 적막이 은근할 때 더욱 잘 드러난다지만, 잠재의식은 진솔했다. 윌의 시간선이 아버지의 낯과 죽은 송장을 겨냥했다. 바뀌어 달라지지 않고 약속된 기억은 미약한 만큼 선명했다. 부족한 추억이 목덜미를 감싼 스카프에 투영됐다.
갈망은 애착을 자아내요. 당신이 애비게일에게 부성애를 느낀 건 그녀에게서 당신을 보았기 때문이었죠. 얼마 자라지 못한 당신을요. 그녀의 과분하고 상냥한 욕망을 당신은 깨닫고 있었잖아요?
…난 몰랐어요.
힘겨운 눈초리가 바닥부터 올라와 그에게 던져졌다. 잘못은 누구에게도 없었는데. 그윽히 고인 관념은 이성에 덧얼어 의식을 마비시켰다. 바닥에 반사되어 흐릿해진 이채가 짧은 비음을 흘리며 성질을 부렸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다를 바 없이 나지막한 성음을 읊조리며 윌에게 고개를 돌렸다.
떠올려봐요, 윌. 애비게일과 당신의 욕망은 같았어요. 비견할 수는 없지만.
그 애와 나는 동등해요.
알고 있어요.
티나게 입술을 축인 윌은 수를 세었다. 가능한 한 남김없이 모든 경우의 수를. 세상에 정해진 수순이 있다면 잘못된 일도 없으리라. 다리가 아팠다. 윌은 투명하게 젖은 수면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녹은 눈처럼 축축해졌다.
***
이곳은 비가 자주 내려요. 요즘 들어서는 장마철이라 착각할 정도로 아주 윤습하고 불안정하죠. 그러나 고통은 없어요. 당신이 깨달을 사랑과 상상에 경계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적어도 변화는 일어나고 있겠죠. 누군가 그랬듯, 내가 보고 느끼는 것들은 모든 걸 어지럽혀놓으니까요.
당신의 현실은 상상에 가까워요. 상상의 범주는 경험에 한정되기에 심상이라 불리지만 윌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죠.
영원과 무한은 언어로만 존재하는 개념이에요. 아무리 자유롭다 한들 헤아릴 수 없는 제한이 다른 경계가 되곤 하죠.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일자로 오므려 말할 구석이 있는 듯한 입술이 샐쭉했다. 그는 윌의 옆자리에 앉아 다리를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습기를 먹은 천이 구겨지며 사부작대는 기척이 듣기 좋았다. 무릎을 감싸 안고 웅크린 자세가 그와 어울리지는 않아도 윌의 눈높이에는 꼭 맞았다. 여전히 비가 내렸지만, 우산은 이미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정갈히 접혀 실체를 잃은 척 굴었다. 그는 태연하게 펼친 검지로 윌을 가리켰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또 다른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보는 것이 어떤 것을 숨기고 있는지 보고 싶어 한다.
르네 마그리트. 내가 남들과 달리 특별하다는 소리나 할거라면 지금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
윌이 왜곡된 자의 이름을 웅얼거리며 언뜻 정중한 척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자 게슴츠레 올려다보는 눈 맵시가 야살스레 접혔다. 소란스럽게 자욱한 상념은 뾰족한 송곳니처럼 뻔했고, 동시에 기대감으로 충만해져 백일몽을 보였다. 윌이 훤히 드러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자 그는 잘게 웃음을 흘리며 윌의 콧잔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와 윌에게 어울리는 말이 필요했다.
윌의 눈은 통념으로 흐려지지 않았어요. 소재를 가리지 않고 남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봐요. 하지만 이건 당신이 유별나다는 뜻이 아니에요. 나와 닮았다는 얘기죠.
그 말은 꼭, 비범하지 않더라도 의지에 따라 남아있는 그가 믿음에 견주어 윌의 양상으로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충족을 향한 갈증을 그물로 감싸고 핵심으로 파고드는 이드의 충동은 굳고 단절되어 열망으로 변질했다. 윌은 마른 침을 삼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 일생일대의 아네모이를 이해해봐요.
그가 윌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연인을 섬긴다기에는 다소 무던했고, 자식을 대한다기에는 너무 애틋했다. 무게를 지탱하듯이 갈빗대 아래를 감싸 안은 손길이 따뜻했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윌은 그의 손이 자신의 늑골을 가르고 들어와 가슴과 배, 뒷덜미에 닿을 때면 그의 손금이 살갗에 새겨지는 착각을 하곤 했다. 어디까지나 착각을. 그들은 서로에게 닿을 때면 같은 온도가 되었고, 그는 어두운 밤에 보이지 않는 헛것 같았다. 윌은 순간적으로 뻐근해지는 목구멍을 느끼고 몸을 굳혔다.
내가 당신에게 닿으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당신은 내가 사라지길 원한 적 없어요. 당신의 정의를 따르지 못했죠. 당신이 곁에 남기를 바란 거에요.
나의 어린 윌, 당신의 본성에게는 아직 어미가 필요해요. 기억이 자리 잡은 곳에서 길러준 이의 상과 자아가 늘어진 테이프처럼 재생됐다. 오랫동안 찾아 헤맨 부모는 가물가물하다 못해 고비를 넘기셨다. 기량과 타고난 성질이 깨어나기 위한 성장의 발판, 시련, 압박. 어쩌면 영겁의 시간이 지나도록 익숙해지지 않은 몸가짐을 예측할 수 있는 공식은 없었다. 축축하게 젖은 손가락이 발목을 쓸어올렸다. 서리 낀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에 모습을 나타내 보여도 그 앞에 선 이는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이 수순이었다.
무의식적 사고는 얼마든지 불수의한 행동을 일으켜 당신이 모르는 숨을 거둬갈 수도 있어요.
모순적이네요. 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요.
어느새 얇아진 빗줄기는 떨어지기도 느리게 떨어졌다. 그들의 발끝이 마주 닿고, 윌은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멀리서 바라본 그들은 외딴 섬같이 옹송그린 채 사분한 소음을 불렀고, 내린 비는 얼어붙어 수면과 다를 바 없었다. 냉랭한 얼음장 하나를 두고 비류하는 빗줄기는 거꾸로 휘어가는 듯했다. 윌은 생각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눈이 내리지. 검푸른 소용돌이나 환락과 달리 공허에 가까운 윌은 그 어느 때보다 담담하고 편안했다.
내가 당신에게 전부 삼켜져도 눈치챌 수 있을까요?
두려운가요?
그건, 아뇨. 하지만 당신은 내 희생양이 될 생각이 없어요, 그렇죠?
당신에게는 제물이 필요하지 않아요.
바라본 하늘에 비치는 건 불미한 이가 아닌 윌 자체였으므로, 윌은 헛된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마주한 그의 눈은 무슨 색이었던가. 간질거리는 기도에서 기침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인정은 누구에게나 따뜻한 기운을 건네는 법이라 윌이 지어 보이는 희소에는 막연한 확신보다 은근한 신망이 묻어났다.
내가 달리 뭘 할 수 있겠어요.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든 충족될 거에요.
그게 문제죠. 당신이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당신은 나를 이해할 수 있어요. 내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죠.
의존하라는 얘기인가요?
공존하게 될 거라는 얘기에요.
…내가 당신과 있는 동안에는 아무도 죽을 수 없을 거에요.
말끝이 늘어져도 발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윌은 나른한 손짓으로 허리에 감긴 그의 팔을 풀어냈다. 늘어난 은유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서로가 더욱 진정했다. 하지만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는 밀려드는 파도처럼 짠내 나는 빗물을 광범하게 덮었다. 찬연함의 바로 면전에 서야만 느껴지는 것은 억압된 서로의 개념이었으니.
그럼, 진실을 위해.
그들은 잔을 높였다.
***
소소한 베풀기를 마친 그들은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얼음장 같은 수면이 그들의 발자국을 쉽게 반겼다. 냉기가 흐르며 일어나는 정신과 신체, 이성의 반응들은 이타적이었지만 증명이 가능하지도, 눈으로 볼 수도 없었다. 오래 움직인 다리 근육이 무겁지는 않았으나 죽은 새처럼 마비되어 한시에 추락하던 생기에 빠져들 듯했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간혹 언쟁에 지친 이가 자비를 베풀듯, 윌은 다른 차원을 내다보고 싶었다.
넘쳐흐르는 감정처럼 진리도 측정이 가능하면 얼마나 좋을까. 윌은 아둔하지만 어리석지는 않은 존재라 희미하게 갖춰진 기원전의 권위적인 위로에도 그를 맞아들일 수 있었다. 그들은 얼어붙은 호수의 끝에 남은 제단으로 다가갔다. 차오르는 달에는 반세기의 약속이 새겨져 있었다. 그가 기도를 올리듯 입가에 가져다 댄 왼손을 내려 제단에 놓인 해부도를 쥐었다. 남은 한 손을 곧게 내미는 그의 동공은 고즈넉하게 열려있었다.
당신은 핏덩이에요. 갓 태어난, 그리고 내게서 떨어져 나간. 당신에게 흐르는 피가 그 증거고 영원이죠. 자, 윌. 내 손을 잡아요.
뭉툭한 손가락의 끝과 도드라진 관절에서부터 잇따른 혈관. 핏기가 돌아야 할 얇은 피부들이 창백했다. 윌은 발바닥 밑에서 맴도는 서늘한 기운을 느꼈지만 지시하듯 내려진 그의 요구를 구태여 거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제 앞에 있었기 때문에. 윌이 자신의 말단 하나를 건네 수벽이 마주하도록 하면 그는 윌의 손목을 부드럽게 돌려 잡아 검지로 맥박을 짚었다. 맞닿은 피부는 팔딱이는 핏대가 낯설게 느껴지질 정도로 차가웠고, 겹쳐진 갈색 홍채에는 깊이의 정도를 헤아리기 어렵게 윌의 푸른 속이 비쳤다.
가녀리고 양순하지만 단호한 손길이 윌의 중수골, 척골을 따라 미끄러졌다. 만약 창밖에 선 이가 있더라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손등을 내리누르는 기세는 반드시 한 번에 반 단계만을 거쳤다. 윌의 눈길이 나동그라지지 않겠다는 듯 흔들리는 대로 무너지고 쌓아 올려지기를 반복하는 자신의 손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이윽고 해부도의 칼날이 힘있게 압박된 손목동맥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의 명치와 배꼽의 사이가 얕게 오르내리길 반복했다.
결백한 손에서도 미끄러지지 않도록 가운데에 홈이 파인 대와 10번 날이 단단히 고정된 일체형 메스는 언제나 망설임이 없었다. 차가운 금속이 파고드는 느낌이 생경했지만, 고통은 공상에 가까웠다. 첨예한 날은 신경을 훼손하지 않았고 미약한 통각은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윌은 곁에 서 있는 그의 존재를 빌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세상에서 두 번째로 비현실적인 상황으로 여겼다.
좁은 틈새로도 무리를 이뤄 어둠이 얼룩을 간직하도록 하는 빛처럼, 윌의 열망은 천박하다는 듯 갈라진 동맥에서 밀려 나왔다.
한번 접촉한 것은 떨어져서도 서로를 떠올리고 공명해요. 누군가가 한 사람을 기억하면 공간의 원근을 이 나간 나이프처럼 쓸모없어지죠. 당신은 영혼을 믿나요? 당신의 흔적 중 일부를 차지한 이상향은 뼛속에 고인 불안을 긁어내지만, 그의 영혼의 존재는 빈 결함을 채워낼 수 있어요. 서로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요. 알고 있잖아요.
순수한 영혼은 하늘에게 신의를 얻어 화를 내린다 믿어지는 넋과 교감할 수 있는 동물이 되어 신성을 갖고 태어났다. 재탄생과 윤회, 영생. 고통은 멈추지 않았지만, 그는 윌의 불안을 잠재웠다. 빛과 태양으로부터 생명을 앗아오는 법을 알았다. 만약 영원히 풀리지 않는 저주가 있다면 저주를 내린 이는 영생을 살 수밖에 없으리라. 윌은 헤아렸다. 광활하고 웅장한 바다에 나를 놓고 잠수할 거에요. 그럼 나는 더 이상 당신만의 이방인이라 불리지도 못하겠죠.
그는 침착했고, 얼어붙은 바닥에 떨어진 생혈은 성체 일부가 됐다. 선득한 검은자를 굴려 설핏 올려다 본 그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였다. 원을 그리는 체액을 따라 윌의 속이 뒤틀렸다. 몰상식한 말처럼 사라질 정신은 아니었다. 자유롭지만 짙은 발자국에 가까웠다. 윌의 폐부가 부풀고 긴장된 팔뚝 근육이 수축하며 팔꿈치가 허리 가까이에 붙었다. 내장이 뱀처럼 몸 안을 기어 다니는 듯 고양된 압박감이 배꼽에서 갈비뼈를 느긋하게 훑었다. 촛농처럼 손목을 따라 넘쳐흐른 혈흔이 혼의 뿌리처럼 갈퀴를 뻗었다. 짓궂게도 정갈히 감쳐물려 굳은 선을 그리던 그의 얇은 입술이 달싹였다.
말해봐요, 윌. 당신은 나인가요, 아니면.
그가 이어붙을 말을 윌에게 물어보듯 잠시 숨을 죽였다. 시간 사이의 틈이 고요해 분명해진 맥동은 태초부터 자라난 정근을 삼켜낼 것처럼 간헐적으로 팔딱였다. 윌은 마비된 듯 저릿한 팔뚝과 옥죄이는 쇄골을 느꼈다. 뒤집혀 흔들리다 쏟아지는 양수는 끊임없는 강물같이 엷붉은 자국을 남기고 답답할 정도로 검은 관능을 씻어내렸다. 가끔은 그가 맴도는 침묵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가, 순결이 남긴 죄책감은 하늘이 내린 풋사랑의 흔적기관이나 다름없었다. 윌이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지만 이내 희게 질린 관절마디는 힘을 잃었다. 버석한 입술 사이를 붉어빠진 살덩이로 훑자 느긋한 날숨이 명치 부근에 고였다. 얇고 판명되지 않은 그의 외견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내가 당신인가요.
적막이 이어지는 중에 굳이 단어를 고르려는 노력이 무상했다. 그는 한마디로 만족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윌은 혓바닥을 넘어가는 타액을 삼키며 녹녹한 미소를 잠시 지어보이고 말았다. 그는 오래전부터 결말을 정해두었으며, 되돌아온 종지부에서 직면한 현실이 왜곡된 본성일지 다정하고 원초적인 회귀 본능일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정의였다. 그는 언제나 지독하고 찬란하고 어둠이었다.
윌의 하순이 무언을 전하듯 가늘게 떨렸지만 나오는 것은 갈라진 손목동맥을 타고올라 만연히 와닿는 그의 손끝과 교감의 자취, 어둠 아래에서 섬찟하게 튀어오르는 불꽃에 불과했다. 다행히도 윌은 어렴풋한 감각 속에 잠식되어서도 현실을 자각하는 법을 알았다. 내 이름은 윌 그레이엄이고, 지금은 새벽 2시, 그리고 이곳은…
***
그가 날로 그어진 손목을 받쳐 잡았다. 허리를 숙여 비스듬히 흐른 피가 고인 손바닥의 가장 어두운 곳에 입술을 묻었다. 장엄하고 깨끗한 붉은색 체액이 서슬 퍼런 기운을 토해내며 그에게 삼켜졌다. 내가 사랑하던 절명은 누구보다 어리로웠으며 그가 머금은 생명력은 어느 때보다 밝은 빛을 띠었다. 어떤 공동체의 주인들은 열없이 눈 내리는 숲에서 밭은 호흡을 거리끼듯 서툰 순정과 비속함을 나누며 살았다. 그들이 한자리에 마주할 때 윌의 허벅지에서 비린내 나는 독혈은 완전히 빠져나가고 무구한 혈기만이 남았다.
영속될 것만 같았던 어스름이 마지막 숨을 넘겼다. 우묵한 손바닥 가득히 날 것에 가까운 그의 혼이 담겼다. 바닥을 나뒹구는 그들의 흩어진 언어. 앞으로는 오지 않을 세계. 불거진 뼈를 피하고 찢어진 살에서는 노송나무 냄새가 났다. 그는 일렁이는 물결에 사이의 골처럼 해가 져도 윌의 무분별한 대아에 남아 천문을 이야기했다.
문드러진 윌의 사석을 달래는 그는 반항적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몇 가지 챙겨야 할 연정이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천진하게 영원을 언급하며 변치 않으리라 단언할만한 것이었다. 무더기가 된 감정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휘청였지만 그 속에서도 놓으려들 때 쥐어잡히는 사애가 윌에게는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지긋하게 중첩되어 고작 하루아침에도 무너질 기억에는 그가 기울였던 순순한 관심이 있었다. 그가 순을 거두고 한쪽으로 기운 듯하게 고개를 들었다. 가쁜 쾌락으로 충만한 그의 본능을 마주한 윌은 근육을 이완시켜 그에게 잡힌 손을 늘어뜨렸다. 따끔거리는 미열로 볼이 발그스레했다.
당신은 나를 믿었어요. 당신은 그에게 욕정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욕망은 두려움이 되어 모습을 내비쳤죠. 나는 당신을 믿었지만 윌은 기대를 저버렸고요.
기대는 예언이 아니라 막연한 추측에 불과해요. 소망이 현실에 나타났을 때 나는 당신이 바라는대로 굴지 못했을거라고요.
누군가가 해를 입었다는건 누군가는 구해졌음을 뜻하죠. 무너진 하나는 또 다른 선택을 만들어요.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를 위해 붕괴되고 당신의 세계 또한 그렇게 유지돼요. 에로스가 힘을 잃을 때 사람들은 타나토스를 따라요. 당신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나요?
당신의 관심과 나의 피해자들을요, 위선과 신념을요. 설명을 채 하기도 전에 가장 단단한 곳까지 닿았던 당신을요. 모든 게 시작으로 돌아갔죠. 무릇 탁하고 악한 것이라도 내게 느껴진다면 증명은 필요하지 않아요.
복잡한 법률은 시간이 지나 잊혀지기 마련이었다. 그가 멎지 않은 핏줄기가 심줄의 결을 따라 흘러떨어지지 않도록 받들고 있던 윌의 손목을 되잡았다. 남은 냉기는 윌에게로 옮겨와 자리를 틀었다. 단언컨데, 윌은 그가 읊은 교리 아래에서 위안과 함께 정제된 정애의 세례를 영했을 것이다. 윌이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축이자 그는 가라앉듯 웃으며 두드러진 윌의 손목뼈를 문질렀다. 서리처럼 깔린 공기가 엇그제처럼 제법 차갑게 열을 식혔다.
한순간의 깨달음은 명석하지만 명백하게 밝혀지지 못할거에요.
천천히 말해줘요, 내게.
당신을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있기나 할까요.
…미학은 종잡을 수 없고 난 당신을 부정할 수 없겠죠.
내가 어디에 있는지 느낄 수 있을테니까요.
윌은 공연한 미소를 지으며 음미하듯 깊고 넓은 숨을 쉬었다. 감각은 그리스에서부터 이성을 부정하며 시작되었다. 고뇌가 깊어도 보이지 않는 지각에 윌은 자주 온건한 반대를 느꼈다. 발 밑 얼음 조각 중 가장 넓은 것이 열화되어 녹아내렸다. 맥박치던 하늘은 속이 훤히 비치는 물가에 잠식되어 경계를 구분할 수 없었다. 확신이 없으면 무슨 상관인가. 윌 같은 부류는 자신을 잘 알았다. 비틀린 열정과 애욕의 원천에서 비롯된 아름다움 따위를. 내내 끝까지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윌이 바란다면 무르게 위열을 건낼 그를.
우리는 원하는 것이 생기면 그 곳에 초점을 맞추고 나아가야해요.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무엇을 해야하는지도 알아요. 받아들인거죠. 희망이 얼마나 추악한지와는 관계없어요. 나는 윌이 스스로 나아가는 법을 배우길 원해요. 단순히 나를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저를 보아야 하죠. 당신도 함께요.
그는 윌과 가장 친밀하며 쉽게 대변되고, 간단히 어긋나면서 이튿날에는 이음새를 매꾸는 이였다. 단순히 일어나는 일들. 사라지거나 잊어서는 안 될 것들. 그리고 윌이 기억하고 윤회하는 순간들. 윌에게 틀어진 것을 올바른 자리로 되돌릴 힘은 없었지만 허락받지 않은 끝을 이어나갈 관용은 있었다.
아마도와 나중은 의미를 잃었다. 추측만으로도 온갖 경우의 수는 응고되지 않고 물에 섞여들어 반향을 불러냈다. 윌은 마지막 남은 조각을 손수건에 감싸 간수하듯 그 중에서도 가장 선연하고 애가 타는 것을 골라야했다. 그가 윌을 향해 상체를 숙이며 손을 놓았다. 짙게 젖은 손마디가 고조된 갈증을 잠재웠다. 윌은 그를 마주바라보았다. 사뭇 모질었던 그는 여실했으며 익숙한 자리까지 와닿았다는 사실은 불러일으킨 설렘에게 사그라들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가 차근한 성음을 둥글게 짚었다.
길을 찾아요, 윌. 집으로 가는 길을 찾아요.
놓은 손에 잔열인지 모를 온기가 남아있었다. 그의 머리 너머로 떠오른 별이 보였다. 윌은 무던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목선이 곧게 드러나도록 고개를 들었다. 멍한 구석 없이 나른한 얼굴이 만족스러웠다.
윌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당신이요?
***
그에게 부여된 신체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수면이 깨지고 거대한 파도가 밀려들어온다. 조금 전까지 꾸었던 꿈은 결정만 남기고 사라진다. 열정, 어쩌면 평화. 긴장감은 가시지 않는다. 처음 그들이 서 있던 자리로 돌아왔을 뿐이다. 잿빛 물결이 잔잔하다. 저 멀리에 보이는 세상 끝의 집은 지붕이 농홍하고 여전히 전파가 닿지 않는다. 떨어져나간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며 손등께를 스치고 지나간다. 비는 짙게 내리지만 수위을 높이는 것은 범람한 낙루요, 물낯은 고요하다. 윌은 나른하게 목을 뒤로 젖힌다. 이윽고 강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