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인트 | @Saint___xxx
Dearest,
멈춰버릴 것만 같았던 절벽의 시간도 여느 순간과 같이 과거가 되었고,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미래는 지금까지 그랬듯 새로운 장면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한니발은 당연하게도 새로운 삶에 아주 익숙하게 적응해갔다. 이미 그는 몇 번이나 새로운 신분으로 삶을 시작했었기에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제 것이 아닌 이름을 타인들에게 소개했고, 새 직장을 구하고, 능숙하게 그의 명예를 구축해냈다. 그는 여전히 사람들을 자신의 만찬에 초대했으며 우리의 식사도 여전히 그가 만족하는 음식들이 올라왔다. 영화나 소설 따위에 자주 등장해 지루하기까지 했던 드라마틱한 변화는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이질적일 정도로 평안한 일상이 똑같이 흘러갈 뿐이었다. 마치 우리가 맺을 결실이 곧 삶의 끝을 의미한다고 여긴 날 비웃기라도 하는 듯.
홀로 그 절벽에 남아 파도 소리를 듣고 있는 날 비웃기라도 하는 듯.
지금처럼 목욕을 하는 도중 듣는 물소리에서, 거울로 보이는 그 날의 흉터들에서 그날의 보름달이 보였다. 그 보름달이 비춘 검붉은 피들이 피부를 흥건히 적시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욕조를 채운 물들은 순식간에 겨울 바다가 되어 흉터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칼날같이 아린 겨울 바다에 몸을 담그면, 가라앉는 와중에도 아름답다고 생각한 그 날의 수면을 보는 것만 같은 착각도 들었다. 그래. 보름달이 일렁이며 환상인 것 마냥 반짝거리는 수면을 향해 우리의 검붉은 피가 퍼져 오르던 그 순간은 너무나도 강렬했다. 그 강렬함이 뇌의 주름 사이마다 들어차 잊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만든 것이 분명했다. 익숙해지리라 생각했다. 제아무리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라고 해도 짧으면 몇 시간, 길어도 한 달 안에 무뎌지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절벽에서 모든 감정을 처음 마주했을 땐 놀랍도록 벅찼지만, 그래서 더 차분했고 덤덤했다. 적어도 호기심과 그에게 휩쓸려 이성을 잃을 만큼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와 비행기를 타고 낯선 땅으로 날아와 그가 나를 배려한 고립된, 새 보금자리에서의 삶을 시작했을 때 역시 평안했다. 길거리의 개들을 데려와 보살피고, 가끔 보트 수리 일을 받아 하고, 그와 장을 보러 다니면서 아무 연고도 없는 타지에서의 새 삶에 완전히 녹아든 것만 같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한니발의 사냥에 더 이상 동참하진 않았지만 그가 내어오는 고기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먹었고, 그가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에 그를 따라 무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은 적도 있었다. 스스로에게 너무 모순적인 상황들의 연속임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싶었다. 그간 본능을 부정하고 도망치며 돌아왔던 시간들을 단 한 번이라도 바로잡아 누리고 싶은 마음이 몸부림쳤다. 그와의 사냥에 동참하지 않았던 건, 마지막으로 쥐고 있는 최소한의 도리였다. 우습겠지만 나의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으면 그간 정의를 위해 살아온 인생들이 모두 허물어져 버리는 것만 같았기 때문에. 겨우 그것이 내가 지켜야 하는 윌 그레이엄의 모래성이었기 때문에.
...겨우?
”허억, 허억...“
순식간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내가 욕조에 잠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급히 일어나 막힌 숨을 몰아쉬었다. 코와 입으로 들이켠 물들을 뱉어내며 연신 쿨럭거렸다.
“윌.”
“...”
“윌? 괜찮아요?”
“...예. 그냥 물이 좀 들어갔을 뿐이에요. 무슨 일이죠?”
“윌이 한참이나 나오지 않길래요. 벌써 두 시간이 지난 걸 아나요?”
“잠시 졸았나 보군요. 금방 나가죠.”
“저녁이 거의 다 됐어요. 맞춰 내려와요. 윌.”
“알겠어요. 한니발.”
한니발의 그림자가 문을 벗어난 걸 확인하고 욕조 밖으로 나왔다. 세면대 앞의 거울을 보며 머리를 스친 이질적인 생각의 혼란에서 벗어나고자 애썼다. 스스로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느끼는 경험은 한 번이면 족했다. 한니발이 차려준 저녁을 먹고, 강아지를 돌보다 잠이 들면 잊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중얼거렸다. 방금 물에서 나왔음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애써 무시하고 옷을 걸쳐 입은 후 한니발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늘 유난히 목욕이 길었어요. 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요즘 외출도 거의 없고 혼자 있는 시간에 무의식적으로 의존하는 걸 보니 고민이 있는 것 같군요,”
“상담이 다시 시작된 건가요.”
“그럴 리가. 그저 윌의 상태가 걱정되는 거예요. 우리가 그 달빛을 삼킨 날. 당신은 내가 되고 나 역시 당신이 되었으니까요. 윌. 부디 숨기지 말고 말해줬으면 좋겠군요.”
“난 괜찮아요 한니발. 걱정하지 말라고 해두죠.”
한니발이 가는 눈으로 날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묵묵히 식사를 이어갔다. 그는 이곳으로 넘어온 후 내가 그의 사냥에 동참하지 않는 걸 못마땅히 여겼다. 내가 마주한 이 환상들을 그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한다면 분명 불안정한 날 흔들고 싶어 하는 건 굳이 재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본능을 받아들여 ‘우리’가 가진 힘을 직면하고 사용할 것.‘ 한니발이 속삭였던 문장들이 가진 달콤함을 이제는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그의 눈과, 달콤한 말들이 잊고자 했던 통증들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옆에 있으면서 생겼던 상처들 사이로 환상통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상처투성이인 몸 전체에서 발열과 찢어지는 통증이 이는 것 같았다. 식사를 위해 포크와 나이프를 쥔 손에 땀이 생겼다가 순식간에 갈라질 듯 건조해지는 걸 느끼며 불안정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내일은, 외출을 할까 봐요. 생식 재료가 다 떨어져서요. 영양제나 허브...같은 것들을 사러 마트에 다녀올게요.”
꽤 오랫동안 외출하지 않았다는 한니발의 말을 의식한 말이었다. 실제로 키우는 개들을 위해 만들어 두었던 다량의 생식들이 떨어졌기도 했고. 꽤 적절한 말이었다고 생각하며 앞에 놓인 뷔프 부르기뇽을 한 숟갈 떠먹었다. 더 이상 그가 내오는 음식들이 소인지, 양인지, 사람인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걸 생각하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이 아닌가?
“좋아요. 윌. 가능하다면 자주 나가는 걸 권하고 싶군요. 이곳에 정착한 이후로 마음을 쉽게 못 붙이는 건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윌처럼 아무리 사회성이 낮다한들 아예 단절된 채로 지낸다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아지죠. 부디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오길 바라요.”
“겨우 마트인데요. 좋은 시간을 보낼 장소는 아닌 거 같군요.”
“단언하지 말아요. 특별한 이벤트는 장소를 불문하고 찾아온다는 거, 잘 알잖아요.”
“뭔가 일어나길 바라는 건가요? 한니발?”
한니발은 말없이 고기를 떠먹는 나를 흡족하게 바라보다 본인의 식사를 이어갔다. 그의 알 수 없는 의중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만, 웬만해선 그에게 이입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가지는 생각들이 그의 것인지, 나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순간에 놓이는 건 좋지 않음을 넘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내가 무엇인지 나의 것이 무엇인지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 거울에 비친 모습이 어떤 단어로도 정의할 수 없는 형태인 것만 같은 기분이 나를 뒤덮는다. 내가 인정한 그와의 유대, 미칠 듯 환상적인 아름다움, 검붉은 사랑의 감정들은 그를 떼고 보아도 완전한 나의 것이지만, 그 외의 부가적인 감정들은? 그가 나를 ’이마고‘로 만들기 위해 주입했던 그의 감정들이, 그에게 감화되어버린 그 찰나의 순간들에 넘어온 감정들이. 다 지워지지 않고 여전히 잔여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허무한 생각들이 스쳐 갔다.
-
“소 한 마리, 뼈 제거하고 갈아주세요.”
유기견을 데려오는 일은 나의 정의감을 떠나 차마 그만둘 수 없는 버릇이었다. 몰리의 집에 두고 와버린 강아지들에게 가지는 연민과 미안함 탓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강아지들을 책임지고 있을 몰리에 대한 사죄일 지도. 이유야 뭐가 됐든 이곳에서의 삶은 혼자였던 울프트랩과의 생활과 완전히 다른 것임에도 눈에 밟히는 생명들이 길거리에서 죽는 운명을 맞는다고 생각을 하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미안해요. 혼자 살았을 때의 버릇인데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어서요. 만약 당신이 싫어한다면 최대한 빨리 새 주인을 찾아볼게요. 건강해질 때까지만 기르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윌. 내게 미안해할 것 없어요. 나는 윌에게 내 삶의 일부를 주었으니까요. 우린 한 몸 아닌가요? 그러니까 당신이 하길 원하는 것이 있다면 굳이 내 눈치를 보고 허락을 받지 않아도 좋아요. 골격이 아주 멋진 친구를 데려왔군요. 이름은 생각했나요 윌?’
이곳에서 처음 길거리의 유기견을 데리고 집에 돌아온 그 날이, 내가 다시 그에게 빠졌던 날이었을 지도 모른다. 한 몸, 한 몸...처음 그에게 말했던 나의 ‘한 몸’도 그때와 같은 느낌의 단어였을까. 한니발이 내가 느꼈던 그 감정을. 똑같이 느꼈을까? 그의 마음을 확인받고 한참을 생각하며 스쳐 지나간 순간들이 있다. 그 중 우피치 미술관에서의 그의 말들이 제일 먼저 떠올랐던 것은, 그가 아무런 흑심 없이 내게 전한 말 중 가장 진심 어렸기 때문이 아닐까. 눈이 흐려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니발이, 나를, 사랑한다. 비록 아름답지 않은 형태일지라도. 나는 그가 내게 준 것만큼의 감정을 그에게 돌려주었나? 나는, 그에게...무엇을.
쾅, 쾅-
혼자만의 독백을 깬 것은 정육점 주인이 투박한 칼로 소의 척추뼈를 내리치는 소리였다. 코에서 미끄러진 안경을 슬쩍 올리며 고갤 드니 오늘 도축된 소가 미쳐 다 빠지지 못한 핏물을 튀기며 칼날에 의해 조각나고 있었다. 붉은 피가 결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있는 고깃덩어리들이 제 색을 잃어 불그스름한 흰 도마 위로 잔뜩 쌓여가고 있었다.
쾅,
쾅-!
쾅--!
순간 손과 팔에 전기에 감전된 것 마냥 짜릿한 느낌이 튀었다. 고기를 내려치는 정육점 주인의 감각이 생생하게 감겨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멍해지는 정신을 알아차릴 새도 없었다. 손은 저도 모르게 안경을 벗기고 있었다. 눈과 귀는 잔뜩 열려 고깃덩어리들이 조각나고, 갈리는 상황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허브나 야채 따위가 들려있는 비닐봉지를 땅에 떨군 것도 몰랐을 정도로. 칼이 소의 뼈를 내리치는 소리가 고막을 울리고 신경을 타 심장까지 순식간에 도달해 공명했다. 심장박동이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눈을 뗄 수 없고, 귀를 닫을 수도 없었다. 그날이, 그날에 내 몸에 박혔던 칼의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날의 쾌락과 감동도.
“허억, 헉, 헉-”
호흡이 가빠지며 온몸에서 땀이 나오는 감각이 선명했다. 좋지 않은 증상이었다. 외출을 왜 꺼렸었더라. 그래.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일이 생길까 봐. 손에 쥐었던 접이식 나이프 손잡이의 거칠한 그 감각이 선명해질까 봐. 눈과 귀를 ‘변해가는’ 고깃덩어리들에서 거둬야 했지만 이미 멍해진 정신은 귓가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 따위에 집중할 여유가 없었다. 과호흡이 오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뼈를 내리치며 칼을 타고 올라오는 손의 떨림을 정육점 주인을 통해 느끼는 걸 그만두지 못했다. 이산화탄소가 체내에서 빠르게 빠져나가며 눈이 초점을 잃기 시작했고, 어지럼증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정육점의 쇼케이스에 손을 짚었음에도 얼마 가지 못해 온몸을 바닥에 뉘일 수밖에 없었다. 얼굴에 차가운 바닥 온도가 닿았다가 이내 뭉그러져 사라졌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들의 인영들은 그 외곽이 한껏 퍼져 알아볼 수 없었고, 놀람과 걱정이 섞였을 것이 분명한 소리들은 귓가에 도달하지 못한 채 흩어졌다. 내가 기절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감각들이 무뎌져 내게 도달하는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으니까.
쿵, 쿵, 쿵, 쿵
희미한 정신 사이로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뒤집히는 눈을 본능적으로 돌려 소리의 근원을 바라보았다. 높고 길게 나열된 마트 진열대 사이에서 검은 실루엣의 무언가가 날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익숙한 감각의 서늘함이 등줄기를 뚫고 뻗어 나오는 게 너무 생생했기 때문에. 좁고 흐릿한 시야에 홀로 뚜렷한 실루엣을 응시했다. 아주 느릿하게 다가오는 덩어리는 거대했고, 기괴하게 솟은 양 뿔을 내게로 향해 있었다.
쿵, 쿵, 쿵, 쿵
검은 발굽이 흐릿한 인영들을 밟으며 내게 다가올수록 내가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되어갔다. 발에 갈퀴가 달려있다가도 절그럭 소리를 내며 총알을 밟고 있고, 다시 발굽을 달고 걸어오다가 쓰러져 있는 애 앞에 다다랐을 때쯤엔 사람의 발로 서있었다. 무언가가 딛고 서 있는 지점에서부터 검붉은 액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트 바닥에 퍼져나가는 액체를 멍하게 바라보다 홀린 듯 그것의 얼굴을 보기 위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뇌염에 물들었던 당시의 감정이 아주 생생하게 밀려들어 왔다. 스스로를 믿을 수 없는 상황들에 놓여 끊임없이 혼란스러워하고 괴로워하던 그 감정들이. 동시에 한니발이 자신의 사냥에 동참하지 않는 나에게 다시금 벌을 내리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나를 시험하려고, 내게 약을 주입한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웬디고의 모습에서 내가 보일 리가, 내가, 보일 리가. 없었다.
“오, 안 돼. 안돼안돼안돼...”
“선생님, 괜찮으신가요? 정신이 들어요? 앓고 있는 지병이나 복용 중이신 약이 있습니까?”
들것에 실려 옮겨지는 와중에도 빌어먹을 웬디고는 계속해서 나를 따라왔다.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처럼, 네가 지금껏 외면한 것이 무엇인지 똑바로 마주하라는 것처럼. 눈동자도, 표정도 없는 웬디고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게,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
‘윌. 본능을 무시한다는 건 스스로를 부정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죠. 자신을 부정하고 살아가는 것만큼 비참하고 추레한 것이 또 있을까요? 신들은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지 않죠. 즐길 뿐. 상황에 순응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건 가장 밑바닥에서, 자신을 굽힐 수밖에 없는 것들의 전유물이에요. 오직 사람에게 먹히기 위해 길러지는 가축 같은 것들 말이에요. 윌. 우리는 아무리 원해도 결코 그들의 처지와 같아질 수 없을 겁니다. 이미 힘을 경험했고 그 권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버렸죠. 그걸 완벽하게 그려 쥐는 방법도요. 그렇지 않나요. 윌? 좋아요. 예를 들어볼까요. 방목해서 기르는 소들이 자유롭게 풀을 뜯고, 들판을 누비고 달리는 걸 경험하고 축사에 갇힌다면 무슨 기분이 들까요. 안도감을 느낄까요? 자신이 외부로부터 안전하다고 느낄까요? 아니요. 푸른 하늘과 넓었던 날들을 다시 얻기 위해 탈출하고 싶어 할 겁니다. 나갈 수 있는 틈이 보인다면 뿔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그 벽을 향해 들이박겠죠. 인간이라고 다르겠나요. 오히려 더욱 지능적으로 자신이 맛본 달콤함을 다시 느끼기 위해 모든 수를 다 쓸 겁니다. 그 달콤함을 탐하고자 하는 욕망은 참는다고 참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어린아이 손에 들린 막대사탕처럼요. 완전히 받아드려요. 윌. 당장은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손에 계속해서 들려있을 막대사탕을 언제까지나 무시할 수는 없다는 걸 기억해요.’
‘... ... ...’
과거의 한순간인지, 그저 리얼한 환상인지 모를 순간이었다. 밝게 빛나는 배경을 뒤로하고 한니발은 실루엣만 보인 채 나와 상담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말에 대답했다, 분명히, 문장이 완결한 말들로. 그렇지만 정작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무슨 감정을 담아 한니발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가 말을 끝맺자 한니발의 실루엣이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퍼지다가 이내 다시 사람의 형태로 뭉쳐져 나를 덮쳐왔다.
눈이 번쩍 뜨였다. 얼굴에 땀방울이 맺혀있는 느낌이 생생했다. 지금이 현실임을 자각하는 감각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팔에는 링거가 꽂혀있었고 내가 누워있는 병상을 분리하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걸 봐 응급실에 실려 왔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윌? 정신이 드나요.”
“...한니발?”
인기척을 느꼈는지 한니발이 쳐진 커튼을 살짝 걷으며 들어왔다. 땀에 젖어 어중간하게 앉아있는 나를 보더니 내 눈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내 나를 도로 눕히곤 자신도 보호자 의자에 몸을 앉혔다.
“병원에서 연락을 받았어요. 윌이 마트에서 쓰러져 입원 중이라고. 무슨 일이 있었나요?”
“...사슴을 봤어요.”
“그거 흥미롭군요. 무슨 사슴을 봤죠?
한니발은 정말로 흥미롭다는 듯 상체를 내 쪽으로 숙여왔다. 한니발이 정말로 내가 본 사슴이 궁금해서 물어오는 질문이 아님을 단박에 깨달았다. 어쩌면 나도 눈치채지 못 했던 그 순간들부터,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 생긴 균열을 자신의 손으로 메꾸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그가 흥미를 가진 것은 사슴을 본 나의 얘기 따위가 아니라.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한 균열 그 자체였다.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스쳤다. 그는 아직 온전하지 못한 날 사랑함과 동시에, ‘그가’ 완성한 날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니발..., 인 줄 알았던 사슴이요.”
“그 말은, 내가 아니었단 얘기군요. 뭐였죠?”
“정확히는 보지 못했어요. 뭔지 알아보기도 전에 호흡이 곤란해 기절했죠. 제가 여기 누워있는 이유요.”
“그게 호흡이 곤란할 정도였나요 윌?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과호흡 증상이라고 의사가 얘기해 주더 군요. 웬만한 스트레스가 아니면 기절하기 쉽지 않죠. 내게 숨기는 것이 있나요?”
“숨기는 거요? ...아뇨.”
한니발을 빤히 바라보다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멋쩍어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의사가 절대안정을 권유했으니 좀 더 잠을 자는 게 좋을 거라는 말과 함께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는 묘하게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얼굴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He wants to see you. See who you are. See who I`ve become. Know the truth.’
당신이 누군지,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해요. 레드와인을 들이키며 한니발에게 건넨 말이 생생했다. 그때의 마음들도. 그와 함께 떠나고 싶지만 잭에게 들려주어야 할 진실, 홀린 듯 사랑한 그와 나의 본능. 정의와 악을 두고 고민한다는 자괴감. 만약 그때 내가 그를 거부하지 않았더라면. 프레디 라운즈의 죽음을 속이지 않고, 그에게 진정한 나를 그대로 안겨줬더라면. 에비게일이 죽지 않고 우리와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겠지. 잭과 알라나가 죽음의 경계에 다녀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나도, 상처투성이가 될 필요 없이 그의 옆에 서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벌써 몇 번이나 후회한 일들임에도 한 번 새겨진 미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가끔은 그의 마음을 생각하기도 했다. 일생을 걸고 ‘윌 그레이엄’에 도박을 건 그의 마음을. 나의 배신을 알았음에도 포기할 수 없어 함께 도주하자 속삭인 한니발을. 그는 후회를 하지 않는 사람인데도 그 순간 그의 감정은 처절하고, 미련했다. 철저하게 스스로를 신이라고 가정해 살아온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시간을 다시 짜 맞추는, 불가능한 일을 생각할 정도로 흔들린다는 것이 그에게 무슨 의미인가. 그런 생각들을 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런 그의 처지가 통쾌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꿈을 꿨던 우리가 우스워서였다. 정확히는 처음 마주하는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던 한니발과, 자신을 직면하는 것을 외면하고 그의 마음을 끊임없이 곡해해 모두를 구덩이에 밀어 넣은 나의 발버둥이 우스워서. 이미 지나가 버린 일에 후회하고 있는 내 모습이.
‘HE WANTS TO SEE YOU. SEE WHO YOU ARE. SEE WHO I’VE BECOME. KNOW THE TRUTH.‘
그날 저녁의 한니발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의 피부가 촛농처럼 흘러내리는 모습을 천천히 지켜보았다. 피까지 전부 녹아내려 드러난 새하얀 뼈와 생체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장기들이 보였다. 얼음처럼 녹아버린 겉껍데기들은 식탁과 바닥에서 잠시 동안 넘실거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강이뼈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발이 완성되고, 다리가 완성되고, 상체들이 서서히 만들어지다 마지막으로 액체 같은 조직들이 꿈틀거리며 얼굴을 만들었다. 그것이 뚜렷한 모습을 보이며 완성될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앞에 놓인 와인을 들이켜고 있었다. 사실 할 말을 잃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것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나는 이미 그것이 한니발의 재구성이 아닌, 윌 그레이엄이었음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나에게 마지막 저녁에서의 그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한니발, 그가 나를 보고 싶어한다고. 내가 누군지, 내가 무엇이 되었는지. 나의 입으로 듣고 싶어한다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의 한니발처럼 건배를 건네지도 않았고,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나‘의 눈을 홀린 듯 쳐다보았다. 나의 becoming을.
병원이 아닌 익숙한 천장을 바라보고 눈을 떴다. 그간 매일같이 땀에 흠뻑 젖어 복잡한 마음으로 일어나던 것과 다르게 찬물을 끼얹은 듯, 이질적인 차분함이 맴돌았다. 혼란함에 뒤엉켜 엉망이었던 모든 것들이 깔끔하게 정리돼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며칠간 날 괴롭히던 환상통도, 겨울 바다의 냄새도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만 같았다. 이 느낌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뭘 해야 할지 정확히 직면하게 된 것에 대한 대가정도라고 여겨졌으니까. 침대 옆 협탁에 한니발의 수첩이 놓여 있었다. 병원 퇴원 절차를 밟고 그가 나를 내 방 침대까지 옮겨왔다는 건 굳이 유추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윌. 일어났나요?”
“한니발.”
“퇴원절차를 밟고 옮겨왔습니다. 윌이 곤히 자는 것 같길래 부러 깨우지 않았어요.”
“내가 얼마나 잔 거죠?”
“그렇게 오래 자지는 않았어요. 마침 딱 저녁 시간 이내요.”
잠시 그의 수첩을 바라보고 있을 때쯤, 슬쩍 열린 문을 밀어내며 한니발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 들린 트레이에는 김이 올라오고 있는 보울과 잔이 담겨있었다. 한니발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눈웃음을 지었다가 곧바로 협탁에 놓인 수첩을 슬쩍 밀어놓곤 그 위로 트레이를 올려놓았다.
“어지럽거나 그런 건 없나요?”
“아뇨, 정말 괜찮아요. 오히려... 정신이 아주 맑아졌어요.”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하지만 쓰러지면서 바닥에 머리를 박았으니 당분간 몸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한니발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내 얼굴에 닿아 귀 부근을 쓰다듬어도 그냥 그의 눈만 빤히 바라보았다. 한니발이 그런 나를 보고 살짝 웃음을 보이자 나도 그를 따라 웃어 보였다. 그의 감정들을 가로막았던 이성이 서서히 부서지고 있었다.
“한니발. 내게... 바라는 게 있나요?”
목소리와 손끝이 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무너진 댐에서 쏟아져 나오는 그의 감정들은 아드레날린이 녹은 약물 그 자체였다. 선한 척 미소 짓는 입꼬리, 눈썹 뼈 아래로 그늘져 이따금 안광이 비치는 그의 눈빛, 떨리는 신체 신호들을 잔뜩 드러낸 채 자신을 보고 있는 나에게 가지는 붉은 감정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손바닥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가는 걸 신경 쓸 수 없을 만큼 중독적인 약물 그 자체인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내 머릿속에 가감 없이 꽂혀 들어오며 뉴런이 위험에 절여 반짝이고 있었다.
“굉장히 추상적인 말이군요. 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답이 너무 정해져 있는 물음이 아닌가요? 내가 뭘 바라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잘 알고 있잖아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있나요?”
“그냥, 당신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서요.”
“윌. 뭘 망설이고 있죠? 당신이 원하는 것이 곧 내가 바라는 것이에요.”
그는 대답을 넘기며 엄지손가락으로 이마의 흉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문지 몇 년이 지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불균형한 피부를 뚫고 검붉은 핏방울들이 흐르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그의 손가락이 맞닿아 있는 부분이 뜨겁게 느껴졌다.
“나를... 먹고 싶었나요.”
“그랬죠. 그녀가 당신을 먹는 것이야말로 당신의 존재로 흔들리는 나를 바로 잡을 수 있을 거라고 했었고 나는 그 속삭임을 집어삼켰죠. 어쩌면, 그녀가 아니었어도 한 번쯤은 윌을 먹고자 했을 것 같네요.”
“나를 삼킨다면, 한니발. 당신의 뭔가가 달라지나요?”
“그건 알 수 없죠. 내가 그 날 당신을 삼켰다면, 당신을 먹는다는 건 분명 가장 확실하게 나의 일부로 만드는 방법이지만, 그런 방식은 공허만 낳을 뿐이죠.”
“그렇지만 닥터 렉터. 지금도 나를 먹고 싶어 하잖아요. 내가 당신의 일부가 된다면 당신의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고도 ’한 몸‘으로 영원할 수 있으니까.”
“윌. 방금도 말했지만 영원하다고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당신을 먹고 난 후의 공허는 어디서 채울 수 있죠? 나의 영원에 흉터가 남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윌. 나는 그저 당신을 원할 뿐이에요. 흉터가 남는 영원이 아닌, 완벽히 아름다운 ’한 몸‘을요.”
그는 날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서까지 날 안고 살아갈 만큼의 애정을 담아, 내가 그의 장막 속으로 걸어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눈앞에 뜨거운 피들이 일렁였다. 그가 나를 삼키려고 했던 증거에서부터 분수처럼 터져 나오는 한니발의 감정들이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끔찍할 정도의 호기심, 식욕, 소유욕 따위를 밟고 서 있는 비틀린 감정. 그건 평생을 계획과 이성에 맞춰 살아온 그가 여유를 잃고 충동적인 행동들을 벌이는 데에 충분했다. 피가 볼부터 배까지의 흉터들을 뒤덮으며 상처들을 울리게 만들었다. 환상통이 절정을 맞이한 듯 했다. 찢어지는 고통과 서늘한 모든 날들의 기억을 뼈와 뇌리에 세기는 것처럼, 한니발이 나의 본능을 열어젖히기 위해 쏟아 부은 감정들을 기억하라는 것처럼.
“그런가요. 난 상처투성이가 되었는데, 이런 내가 당신의 아름다움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까.”
아마도 나는 그와 함께하는 평생을 이런 식으로 되묻고, 의심할 게 분명했다. 내가 이해하기에 그는 심연의 가장 깊은 곳에서 가면을 쓰고 웃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하하. 한니발 당신이요?”
“아무리 나라도 당신이 드러내지 않는다면 모르는 부분이 있답니다. ’윌’이라는 책을 아무리 읽어도 쓰이지 못한 활자의 뒷사정까지는 독자가 모르는 법이니까요. 당신의 상처는 전부 내가, 혹은 우리의 ’지금‘이 만들어질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담고 있죠. 어쩌면, 우리가 굳이 불러내지 않아도 될 마인드 팰리스 일 지도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빈 캔버스보다 숭고하며, 작가의 일부가 녹아든 그림으로 채워진 캔버스가 더 아름다운 게 아닐까요.”
“...윌 당신은, 아름다워요.”
그의 맑은 웃음이 날 너무 아프게 했다. 한니발의 마음을 잘 알면서 그가 바라는 것을 내어줄 수 없는 자신을 알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불완전하고 건강하지 못한 관계의 진척을 완전히 막아버렸다는 걸 알기 때문에. 심장 부근이 저려왔다. 심실의 호흡이 급해지며 피가 급하게 빠져나갔다 들어오는 생생함이 피가 스며든 감각 사이사이를 타고 올라왔다. 그런 와중에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를 보고 웃어 보였다. 웃음이라고 했지만 사실, 고통들을 견디느라 입꼬리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진실 어린 감정도 싣지 못한. 아주 어색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하지만 그냥, 그냥 그를 보고 형편없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꾹꾹 눌러두었던 감정들이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수프가 식겠어요. 오골계 육수에 고기 완자를 넣은 수프에요. 치킨 수프는 아니구요.”
한니발은 한 손으로 내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웃다가 김이 사그라지고 있는 보울을 보곤 일어나 베드 테이블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허벅지 양옆에 호두나무로 짜인 암갈색 테이블이 남색의 이불 위로 올랐고, 그 위로 수프가 담긴 흰 도자기에 금테가 둘린 식기가 커트러리와 함께 나란히 놓여졌다. 협탁의 트레이에는 물잔과 약봉지만 남아있었다.
“식사를 한 뒤 약을 챙겨 먹도록 해요. 그리고 잠이 오지 않더라도 다시 누워 휴식을 취하세요. 내일은 같이 서재 정리를 할까요? 나의 상담실을 함께 정리했던 것처럼 말이에요.”
대답 없이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그는 내 손에 수저를 들려주곤 협탁 의자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수프가 식기 전에 먹으라는 그의 말을 상기하며 한 스푼을 떠 입에 넣었다. 귓가에는 연필이 종이에 맞닿아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내가 식사를 마치고 약을 먹고,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자리를 지켰다. 처음 그를 사랑한다고 느꼈을 때가 생각이 났다. 아무것도 몰랐으면서 속절없이 빠진 그때가. 성경의 루시퍼는 대천사 미카엘의 모습과 일치한다, 그 말이 정말로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잡고 있는 손이 천사가 아닌 악마의 손임을 깨달았을 땐 이미 너무 깊었고, 빠져나오기엔 그가 나의 유일이었기 때문에. 정말 어쩌면. 나의 천사가 아닐까라는 희망이 놓이지 않아서.
이제는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은 무의미했다. 나는 자신의 뿔과 부러진 날개를 내 앞에 온전히 드러낸 그를 사랑한다. 그게 지금의 전부였다.
다음날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일어나 그와 간단한 브런치를 먹고 지난밤 약속한 서재 정리를 시작했다. 사실 날을 잡고 할 정도로 그렇게 거창한 일은 아니었다. 원체 그가 자신의 공간을 깔끔하게 관리하기도 했고, 책장 빈 곳에 우리가 새집으로 이사 온 후 정리하지 않고 묵혀둔 짐 몇 가지를 꽂아 넣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와 나는 테이핑 되어있는 박스를 풀러 내용물을 확인하고 책장과 창고에 정리해 넣었다. 짐 속에는 그가 가져온 수년간의 드로잉북들, 학문 발표 자료들 등을 포함해 우리의 지난 삶들이 환상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들이 들어있었다.
“오, 이게 여기에 있었군요. 워낙 급하게 짐을 챙겼던 터라 잃어버린 줄 알았습니다.”
그가 정리하고 있던 상자에서 장식 케이스를 꺼내며 말했다. 나는 상자를 접는 걸 멈추고 그의 손에 들린 케이스를 바라보았다. 한니발은 케이스의 겉면을 행커치프를 꺼내 닦으며 서재의 책상 한구석에 살며시 올려두었다.
“윌에게 선물하며 내 손을 떠나보내야 했지만 이상하게 그럴 수 없었어요. 당신이 내가 보낸 심장을 보고 있을 걸 생각하며 이 작은 종이를 바라보면 마치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 같았거든요.”
고딕한 받침대에 유리 커버가 씌워진 케이스에는 종이로 접힌 빨간 심장이 낚싯줄에 의지해 매달려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건이었지만 그것이 나의 발렌타인 선물의 초안임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참을 수 없더군요. 어리석지만 당신을 부를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죠.”
“...당신이 저를 사랑하는 걸요?”
한니발은 말을 멈추고 잠시 나를 쳐다보다 책상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나는 최대한 동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미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선을 넘어 넘실거리는 감정이 느껴졌지만 그에게 휘둘리지 않는 모습으로 남아있고 싶었다.
“윌은, 어땠나요. 나를 용서한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넜고, 오로지 우리의 교감만으로 나를 찾아냈죠. 자의로 나를 떠났고 또 자의로 나를 찾아온 것은 다 무엇이었나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미 답을 다 알고 있는 그에게 구태여 말을 얹고 싶지 않았다. 대답할 의지가 없음을 내비치며 입을 다물자 한니발은 별 상관없다는 듯 내려둔 케이스를 다시 집어 올려 내게 내밀었다.
“윌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걸로 대신하죠. 받아요 윌. 이미 우리의 마인드 팰리스에 기록되어 의미를 잃은 물건이지만, 그건 언제든지 다시 채울 수 있으니까요.”
그의 눈이 순수하게 반짝였다. 살짝 휘어진 눈매 끝에 주름진 눈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가 나의 손에 케이스를 들려주고 마저 짐 정리를 하러 자리로 돌아간 순간까지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던 눈을 천천히 내려 반듯하게 접혀진 종이 모형을 바라봤다. 손에 쥐어진 이 작은 심장은 기다렸다는 듯 버썩 말라있던 표면을 서서히 적셔가며 움직임을 시작하고 있었다. 심장이 일정하게 펄떡일 때마다 그가 매달려 있는 낚싯줄이 진동했고, 그들을 품고 있는 케이스가 일정하게 울려댔다.
그가 쥐여준 심장이 의미를 잃었다고?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케이스를 쥐고 있는 손을 타고 느껴지는 일정한 울림에 내 심장이 맥박을 맞춰 뛰기 시작했다. 한니발이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돌아봄과 동시에 눈이 맞은 순간에도 케이스를 든 팔과 심장이 동일한 박자에 맞춰 호흡했다. 쿵, 쿵 소리가 그에게 들리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손을 잡으면 우리의 심장이 같은 심박 수로 뛰게 될까?
“윌?”
한니발의 음성에 허공이 진동했다. 넘실거리며 다가온 그의 파동이 살갗에 닿자마자, 심장의 생이 완전히 죽은 것 마냥 고요해졌다. 순간의 정적에 온몸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짜릿함이 뒤덮였다. 이것이 정답이라고 뇌리에 생생히 꽂혀 들어왔다. 나의 안색을 살피는 한니발에게 이 소름 끼치는 감각을 공유해주고 싶을 정도의 쾌감이 일었다. 막을 틈도 없이 아드레날린이 신경계를 타고 전신에 흘러들어 갔다. 순간 감돈 긴장감에 식은땀이 모공들 끝에 작게 맺혔다 식었다.
“한니발. 지금처럼 당신을 알 것 같은 순간은 없을 거예요.”
홀린 듯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희열 어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감정은 이미 흘러넘쳐 흥건하게 바닥을 적셔낸 지 오래였다. 이상한 해방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날의 겨울 바다에 전부 빠뜨리고자 했던 감정들이 죽은 척을 그만두고 한 번에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한니발이 다가와 나의 얼굴을 감싸고, 몸을 껴안을 때까지 쏟아진 감정들을 감당하느라 몸을 잘게 떨었다. 그의 몸을 같이 껴안지는 않았다. 다시금 천천히 뛰기 시작한 작은 종이 심장을 굳게 잡을 뿐이었다. 귓가에는 ’나‘와는 다른 심박 수로 뛰고 있는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속절없이 흐른 시간 속에서 나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비이성적 위에 불완전하게 세워진 침착함. 과거에 지키고자 노력했던 나의 방어벽들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행동을 제어할 수 없었다. 헷갈리기도 했다. 이 구덩이를 밟고 있는 것은 누구의 의지인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니발의 계획에 발을 들이고 있던 것은 아닐까. 스스로를 의심하고 진실이 무엇인지 외면하며 이어진. 전부, 부질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하고, 그건 온전한 나의 본능이었다. 그에게 처음 와인을 건네러 길게 이어진 가로수 길을 밤사이 달렸던 날이 생각났다. 지금도 그때와 다를 것 없는 마음이었다. 다른 건 그에 전해주고 싶은 것이 ‘와인’이 아니라 내가 목을 조르며 생을 앗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게 전부였다.
끔찍한 상황을 벌이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발끝부터 전해지는 짜릿함은 이미 척추와 신경계를 타고 온몸으로 퍼지고 있었다. 식은땀이 흘러 티셔츠를 적시고, 얼굴을 따라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이 바닥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지만 그런 것들에 신경 쓸 리가 만무했다. 심장이 요동쳤다. 그와의 박동이 같아지기 위한 일임을 눈치채 당장이라도 나오고 싶다는 듯 쿵쾅거리는 것이었다. 이성적으로 이러면 안 되는 것을 알았지만, 이성을 선택해 후회했던 지난날들을 번복하고 싶지 않았다. 한니발이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라면, 정말로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차라리 어디선가 나타나 나에게 말이라도 건다면 미친 것 같은 이 행동들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성이 쥐어 짜낸 고장 난 브레이크에 불과한 상상이었다.
땅에 눕혀져 무기력해진 사람의 목을 강하게 졸랐다. 공포를 마주한 사람의 감정이 그의 피부에 닿아있던 손가락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자기혐오가 가득한 오싹함이 오히려 나의 감각들을 완전히 일깨우고 흥분시키고 있었다. 한니발의 심정. 신의 파워. 신의 즐거움... 한니발의 세계에 완전히 발을 들이는 것이란 그런 불합리한 감정들이 내게 있어 의미를 가지게 되는 일이었다. 아, 이것이. 내가 그토록 외면했던 것들을 완전히 이해해 한니발과의 완벽한 한몸이 되는 마지막 과정이었다.
“쉿, 쉬...”
두려움에 숨이 넘어가는 눈동자를 마주했다. 소리를 가지지도 못 한 악바리가 나의 손에 막혀 흩어짐을 반복했다. 압도적인 공포에 깔린 무기력함과 서글픔을 음미하며 그 공포를 찍어 누르는 힘에 전율을 느꼈다. 목구멍 사이로 역겨움에 토기가 치솟았지만, 그마저도 다른 감정들이 억눌러 삼켜버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의 세계가 나의 것이었다. 한 손으로 사람의 숨을 지배하는 감각의 생생함. 그가 말한 전지전능함이 이런 거라면, 손바닥이 좀먹는 생을 양분 삼아 자라고 있는 쾌감이 이 정도라면. 죽음의 문턱에서 발버둥을 치던 몸뚱이의 움직임이 잦아들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몸부림을 제압하느라 누르고 있던 몸을 털고 일어났다. 피가 막혀 하얗게 뜬 얼굴이 달빛을 받으니 대리석으로 정교하게 조소된 조각상 같기도 했다. 내 손으로 죽인 이의 낯빛을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만져보았다. 아직 온기가 다 빠지지 못한 사람의 피부, 생으로부터 양분을 받아 부드러운 머리칼, 눈물에 적셔져 빛을 담고 있는 것만 같은 눈알. 현실감이 바닥에 곤두박질쳐 꿈틀댔다. 심장은 자신의 형체를 가지게 될 피조물의 탄생에 열광했다. 흥분한 맥과 진하게 내리 앉은 여운을 한참 동안 곱씹으며 주머니칼을 꺼내 천천히 날을 펴 올렸다. 달빛이 반사되어 예리하게 반짝이는 칼날을 보니 땀방울이 송골송골 올라왔다. 수분을 머금어 마찰을 잃은 손이 혹시라도 손잡이를 놓칠까 싶어서 투박한 손잡이를 거듭 되잡았다. 고양된 정신에 여유를 불어넣고자 차분히 숨결을 골랐다.
사체를 내려다보고 서서 한니발이 내게 주었던 심장을 떠올렸다. 그 붉고 거대한 마음이 놓여 있던 성당을 상상하며 하얀 피부를 하나씩 벗겨냈다. 피부와 근육 사이의 지방 결을 긁어내는 손이 쾌감과 혐오감 사이에 놓여 덜덜 떨렸지만 실수 따위의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피부를 벗겨내고, 뼈를 끊어내고... 심장이 펴지던 순간을 상기하며 그가 접은 종이의 자취를 따라 움직였다. 새하얗던 사체가 나로 인해 서서히 핏빛으로 물들어 갔고, 그것이 심장의 모습을 이뤄냈을 땐 나 역시도 조금씩 식어가던 피들에 흠뻑 젖어 있었다. 흥분감의 열기와 죽은 이의 온기가 서늘한 밤공기를 타고 달빛을 향해 솟아오르다 이내 흩어져갔다.
저택의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오는 발소리가 로비를 울렸다. 어둑함으로 가득 메워진 저택에 첫발을 들인 그는 다음 발걸음을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서 나를 기다렸다. 그가 보이지 않음에도 그의 안광이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물기를 잃어 뻣뻣해진 입과 목을 억지로 긁어 삼켰다. 목젖이 올랐다 내려가는 소리가 어둠에 깔려 사라졌다.
“한니발,”
“외출을 했었나 보군요.”
“...”
“저녁은 챙겨 먹었나요? 좀 늦을 것 같아서 가볍게 먹을 만한 걸 식탁에 올려두고 나왔는데.”
“한니발, 내가, 너무 늦은 걸까요?”
한니발은 대답이 없었다. 억만 겁 같았던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한니발의 구두 굽 소리가 두어 번 울리다 다시금 침묵했다. 그가 어디즈음인지 파악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쫑긋거린 귀와 신경 탓에 땀이 조금 났다. 어둠에 놓여 감각들이 예민해지자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몸이 퍽 우스웠다. 사람의 탈을 벗어내기로 결정 한 주제에 여전히 내가 죽인 이의 몸과 다를 것 없는 사람의 기능으로 굴러간다니.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은 껄끄러움에 괜히 혀를 굴리고 침을 삼켰다. 자기혐오가 몸을 불리는 와중에도 자신을 보일 생각에 잔뜩 부푼 심장 소리가 고요함을 뚫고 그에게 들릴 것만 같았다. 얼굴은 희열, 긴장, 흥분, 두려움 같은 감정들이 뒤섞여 나조차도 설명하지 못하는 표정을 띄우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당신이 내게 약을 쓴 거였음 좋겠어요.”
“실수를 번복할 순 없죠. 인간은 실수를 딛고 살아가는 동물이니까요. 느낄 수 있는 가장 어리석고 미련한 감정에 두 번 다시 놓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내어줄 수 있는 건, 전부 내어줬었죠. 내 아이, 나의 행복, 나의 안정...그 모든 걸요. 하지만 신념은 내어줄 수 없었어요. 그것마저 당신에게 주었다면, 나는 더 이상 나로 남아 있을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거든요.”
“어떤 모습이든 윌은 윌일겁니다. 분명히요. 당신이 어떤 살인마에 이입해도 자신이 누군지 확실히 구분해 냈잖아요. 당신의 두려움은 스스로가 아님을 느낄 때 자라납니다. 윌은 자신이 누군지에 대한 선을 명확히 그었고, 그 선을 넘는다면 윌이 아닌 타인임을 인지하고 두려워하죠. 당신이 ’나‘로 존재하지 않을 때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윌은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갈 거에요. 언제나요.”
“당신은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것처럼 굴어요.”
비음을 뱉으며 얕게 웃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그런가요, 중저음의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작게 울렸다. 예민한 청각을 뚫고 들어오는 공명에 오소소 돋는 소름을 애써 무시했다.
“불을 켜도 될까요? 피 냄새가 나서요. 혹여 당신이 다친 거라면 더 늦기 전에 치료하는 게 좋을 거예요.”
“오, 한니발. 다 알면서 내 앞에서 그러지 말아요. 우리 서로 솔직하자구요.”
“윌, 나는 당신에게 나의 모든 걸 보여주면서 거짓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당신을 용서한다는 것도, 당신을 먹고 싶다는 것도,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는 것도. 그 어떤 것도요. 오히려 우리 중 더 솔직하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윌이었죠. ’서로‘라는 말이 내가 아닌 나와 윌을 포함하는 말이 될 수 있을까요?”
“...”
“이제 불을 켜도 되겠나요?”
“...그래요.”
눈을 감은 듯 어둡던 공간에 순식간에 빛이 들었고, 시야에 담겨있던 어둠이 갑작스레 벗겨짐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빛을 갈무리하고 바라본 그는 황홀한 눈빛으로 로비에 비현실적으로 떠 있는 죽은 이의 심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발에 저릿한 느낌이 돌았다. 복층의 난간에서부터 바닥까지, 와이어에 꿰어 고정한 것은 그에게 바쳐진 나의 심장이기도 했다. 그가 느끼는 감정들이 꽂혔다.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 돌아온 심장에 대한 흥미, 나에 대한 벅참과 만족감... 나의 감정들이 잊힐 만큼의 묵직함에 들이받히는 것만 같았다.
“무슨 말로도 이 기분을 표현할 순 없을 겁니다. 당신이라면 내가 말로 옮기는 것보다 훨씬 생생하게 이 감정들을 전해 받겠지만. 그래도. 이처럼 아름다운 작품에 찬사를 직접 전달하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죠. 당신은 역시 아름다워요. 윌. 정말로요. 프리마베라를 처음 봤던 날이 잊힐 정도로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을 거예요. 앞으로 아마 이것보다 숭고하고 탐미적인 작품을 만날 수는 없겠지요. 지금 이 순간은 내게 정말로 중요한 시간으로 남을 겁니다. 새로운 예술관을 맞이하는 경험은 무엇보다 소중하니까요.”
그가 말을 마치고 조심스러운 손으로 심장을 쓰다듬었다. ’생‘의 온기가 닿자 심장의 멈췄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거대하게 꾸물거리며 생과 사를 뱉고 먹는 모습을 홀린 듯 바라봤다. 작은 종이 심장의 맥박이 시간을 찢고 다가와 함께 호흡한 나의 심장의 부추겼다.
“나는 당신이 바라는 것을 영영 내어주지 않을 거예요. 당신과 사냥을 나가는 일도 없을 겁니다. 그건 아무도 지킬 수 없고, 나 역시도 버려진 정의에게 구원받을 수 없게 될 거니까요. 하지만 한니발. 당신은 내게 유일해요. 나를 알게 했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아름답다고 봐주었으니까요. 이게 나의 마지막이에요. 그날의 아름다운 경험을 벗어날 순 없겠죠. 아마 평생 동안 잊혀지지 않고 나를 따라다니는 기억이 될 거에요.”
선물을 바라본 그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부터 나의 차분함은 빠른 속도로 제자리를 찾았고. 한데 뭉쳐 덩어리가 된 감정들을 하나씩 조각내 정리하며 이성을 되돌리고자 했다. 그에게 하고자 했던 말들을 고르며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기민한 심장은 한니발과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의 맥박을 찾아 속도를 맞췄다.
“그래서 더 나는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더 이상 당신의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직면할 거에요. 한니발. 당신의 폭력적인 부분들을 받아드리는 건, 그것처럼 행동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나의 갈증이 차오른다면 당신을 통해 숨을 쉬겠다, 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완벽하게 행복할 수는 없겠죠. 적어도 저는요. 하지만 이건 제가 선택한 길이에요. 이거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눈물이 차오르다 한 번에 터져 흘렀다. 다양한 감정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사랑, 벅참, 미련 따위의 감정들. 그와 마주 보고 서 물기로 흐려진 눈으로 꿋꿋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한니발의 얼굴은 여전히 행복이 들어서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나의 심장박동이 뛰고 있는 손을 들어 그의 심장 부근에 올리곤 나지막이 나의 마음을 대신 전달했다. 같은 심박에 쿵, 쿵 거리는 움직임으로, 허공에서 맞닿은 시선으로.
나의 검붉은 심장이 당신에게 자리 잡길 바라며.
Dearest,
: 가장 사랑하는 당신에게.
BEHINDS
1. 윌이 마트에서 쓰러지고 이송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한니발은 병원에 들르기 전 마트에 들려 윌의 장을 챙겨 이동했다.
2. 병원에서 퇴원 후 윌이 잠을 자고 있을 때 한니발이 대신 생식을 만들었다. 윌과 강아지에게는 사람고기를 먹이지 않는다고 약속한 부분이 있어 정직하게 윌이 구매한 고기로만 만들었다.
3. 한니발이 윌의 침대 옆에 앉아 그린 그림은 자신이 펠라르모 성당에 전시한 심장 그림을 마주한 윌의 그림이었다.
4. 윌이 죽인 사람은 뉴스에 난 적이 있을 정도로 동물 학대 상습범이었다.
5. 시체를 심장으로 만드는 과정 중에 감정 충돌과 돌아갈 수 없는 안온한 날들에 대한 작별을 이유로 여러 번 울었다. -피 튀겨서 피눈물로 보이기도 함-
6. 한니발은 저택 문을 열자마자 피 냄새를 맡고 윌이 자신의 품에 들어온 것을 바로 알고 이미 기분이 매우 좋아진 상태였다.
7. 윌이 저택에 불을 꺼둔 이유는 심장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느끼는 것이 죄책감이 아닌 사냥의 희열이었기 때문에 더 잠식당해 자신을 잃을까 봐 겁나서였다.
8. ‘검붉은’은 윌의 감정이 보다 무거움을 보여주는 표현 중 하나다. 한니발이 접은 심장은 빨간, 붉은 정도로만 표시되어 있다. 둘 중 윌의 사랑이 조금 더 무거움을 의미한다.
9. 한니발은 윌이 이 정도로 자신을 보여준 것에 대해 매우 만족했다. 이게 그가 생각한 윌의 마지막 감화였다.
10. 문장의 호흡, 표현의 정도들도 윌의 정신 상태에 맞춰 구성되었다. 혼란할수록 앞뒤 문장의 연결이 고르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