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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 @rolling_dust

​부활

창조는 파괴를 위해 존재합니다.

만약 창조가 신의 뜻이라면,

파괴 또한 신의 뜻일 겁니다.

 

만약 당신이 제 앞에 나타난 것이 신의 뜻이라면,

제가 끌어낼 당신의 파멸 또한 신의 뜻이겠지요.

 

 

상투적으로 천재는 미치광이라 칭한다.

괴짜스러운 영감의 원천은 쉬이 가려지지 않기 때문으로.

그가 보기에 자신과 같은 땅 위의 존재는 여태껏 존재치 않았기에, 그에게 영감을 주는 것들은 자신보다 하찮으나 살아 있는 것들이었다. 그가 갈증할 아름다움을 위한 제물. 그의 피조물을 창조한다는 신격화에 대한 만족감. 캔버스 위에서 그는, 유일무이한 창조주였다. 죽음으로 탄생을 그리며, 붓끝에 핏방울이 떨어지는 존재. 손끝에 숨통이 내 죄이고 트이는 예술가.

 

경직된 몸짓, 떨리는 근육, 꺾이는 음성,

탁해지는 초점.

죽음을 보는 것.

최종적 타락에 취한듯한 그 표정을 보는 것.

이 모든 것은 신의 역할을 생생히 일깨워주기 위해서였다.

 

 

한니발 렉터,

아무런 그림자 없이, 마치 동이 트듯,

예정된 것처럼 떠오른 검은 태양.

그리고, 그릇된 신.

 

 

 

 

***

 

 

 

 

네 해 전, 젊은 청년은 '피의 예술가'의 광적인 모습에 반하고 말았다. 그가 느낀 것은 연정이라기보다 경외에 가까웠다. 제 피를 이용하여 자신의 예술을 세상에 표출하는 존재. 굳은 핏자국 안에는 그의 피조물이 녹아있었다. 윌은 그 안에서 생경하게 보았다. 자신을 집어삼킬 듯한 위압감. 목을 조를 것만 같은 빛, 어둠. 구석구석을 속박해오는 식물들. 그리고 타락해버린, 인간만 못한 짐승들. 피로 새긴 그의 캔버스에 강제로 담긴듯한 모호한 선과 악은 감상하는 사람을 몰입토록 만들었다. 인류와 삶에 대한 회의감에 목숨을 버리고자 수없이 시도한 그 청년은 그 그림들 속에서 겨우 살아갈 수 있었다. 그에게 유일한 해방구였다. 한니발 렉터, 그 이름만이 그에게는 너무나 좁아터진 세상의 구원자가 될 것만 같았다. 윌은 완전한 그 그림 속의 세상 안에서 살아갔다. 그래서였다. 작은 세상의 개미는, 신에게 이입했던 자는, 이내 창조주의 손바닥 위로 걸어가고 말았다. 피로 물들 캔버스 위로 발을 내디디고 말았다.

 

윌 그레이엄이라는 청년이 그를 찾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예상보다 더 진한 휘장에 싸인 인물이었다. 알려진 것이 이름밖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시회가 열리더라도 그의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조차 없었다. 어쩌면 그의 작품을 온전히 이해할 존재를 찾지 못해서였을까. 그를 가장 잘 안다고 알려진 사람에게 물어도 - 물론 그 사람 또한 베일의 예술가를 직접 만난 적 없었으나 - 윌에게 돌아온 것은 ‘알려 하지 말라’는 투의 경고뿐이었다. 그쪽 세계에서는 악명높은 광인으로 취급받는 듯했다. 그림의 재료가 피였기 때문이었을지, 단지 그쪽의 악명으로 인한 것이었을지는 불분명하나 분명한 것은 그가 조명될 기회조차 없었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윌은, 피 내음이 역겹도록 보이는 그림의 예술가를 찾아야 했다. 그것이 자신의 숙명처럼 느껴졌으므로. 그를 찾는 일에 인생을 허비한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와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좇았다. 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두 해 동안의 조사 끝에 겨우 편지를 부칠 수 있었다. 그는 광명의 존재에게 부치는 편지 자체에 의미를 두고자 답장에 전전긍긍하지 않으려 하였다.

하나 제 인생이 달려있다고 생각하니 그리할 수도 없었다.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붉은 입술이 타들어 가고 손톱 끝에 매달린 상처에서 검은 방울이 질 때 즈음하여 자못 빼어난 필체의 답신이 돌아왔다. 광적인 예술관과는 달리 그의 사생활은 완벽주의로 이루어진 듯한 형태였다. 편지 칼의 놀림에 조바심이 묻어나는 동시에 조심스러웠다. 윌에게 만물의 군주가 서신을 내린다면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어렴풋이 편지봉투에 묻어나는 향을 음미하였을 때부터 펜촉에 묻었던 것이 핏방울임을 알아채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윌의 가슴 언저리에는 단순한 편지의 주고받음 이상의, 다만 그를 만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게 자리했다. 모든 편지를 그의 그림을 보듯 수 번 되풀이하여 읽었다. 윌은 한참 주고받은 편지 끝에 비로소 만남을 부탁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초대에 대한 답신을 받은 것이 올해 초가을이었다. 윌은 지난 4푼의 세기를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의 일생이 이 만남을 위해 진행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날이 제법 쌀쌀해지는 가운데 몸을 잘 챙기라는 한니발의 말을 윌은 잊지 않았으므로, 그의 자비로움과 은애가 윌에게 선사할 경외감은 실로 벅찬 것이었다.

 

한니발의 광적인 예술관과는 달리 그의 거처는 아름다웠다. 교외의 푸른 저택 주위에는 하얀 숲이 자리하였고, 떨어진 단풍은 위에서 보았을 때 자칫 하얀 숲을 불태우는 듯했다. 모순적인 아름다움과 타들어 가는 생명 사이의 갈증은 윌의 눈에 속이 울렁일 만큼이나 완벽해 보였다. 숲의 외곽에선 화려한 꽃들의 향이 뇌리를 찌르듯이 달콤함을 풍기었다. 무언가를 가리기라도 하듯 진하여 정신까지 몽롱해지는 감각. 향 사이로 그가 더 생경하게 윌에게 다가왔다. 베일의 예술가는 윌에게 자신을 찾아올 시각까지 고했다. 새벽이슬이 남아있을 이른 시간이었다. 의문의 꽃의 향은 아마 그 시간대에 가장 짙었을 것이고 발소리는 멀리까지 들렸을 것이다. 살인적으로 고요한 숲에 바람이 불 때, 숲의 비명은 혈흔같이 흩뿌려진, 단풍 위의 이슬로 물들었다.

 

 

 

 

***

 

 

 

 

“당신이군요.”

 

 

“윌 그레이엄입니다.”

 

 

“편지를 주고받은 것도 이 년이 넘었던가요, 이제야 만나는군요.

첫 편지 이후 제 예술을 직접 언급해주지 않은 것은, 나를 직접 보기 위함이었을까요.”

 

 

윌은 편지에서 그의 작품을 분석할 뿐만 아니라 화폭에 담긴 한니발의 의도까지 풀어내었다. 한니발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어조로 윌에게 다시 물었다. 젊은 상대는 당신의 작품에 경외감을 느껴, 선망하는 어린아이처럼 당신의 작품에 매일 감탄하였다고 답했다. 당신이 내 영감이고 신앙이라고 토해냈다. 윌의 답변에 상대는 웃어 보였다. 윌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의 창조물을 보고 있으면, 마치 당신의 피조물이 된 것 같아요. 벅찬 경외감을 떨칠 수 없어서, 실례가 될 걸 알면서도, 꼭 뵙고 싶었습니다.”

 

 

“흥미로운 접근이에요. 캔버스 앞에서 오롯이 제가 창조주가 되는 건 맞는 일이니까요. 경외감이라, 존경에서 비롯된 그 순수한 감정에 제가 과분할지도 모르겠군요.”

 

 

적막한 주변과 오묘한 미소가 둘이 앉아있는 공간의 안팎을 뒤집어버리는 환각을 자아냈다. 주고받은 편지는 첫 만남임에도 농염하며, 익숙한 분위기를 자아낼 촉진제가 되어 주었다. 그를 만나고 나니 더욱 생명의 역동감이 돌아, 홍조를 띤 윌은 마른침을 삼키곤 다소 흥분한 상태로 말을 이었다.

 

 

“당신의 예술은, 신의 영역이에요. 대지를 가르고 만물을 창조하듯, 그 순서는 너무나 주요한 것들부터 시작하여 생명 간의 이상적인 조우를 나타내었죠. 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 자신의 생명을 뜯어내어 화폭에 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한니발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는 기쁨이었을지도 몰랐다.

 

 

“당신 또한- 창조주의 인간이라 믿어도 되는 걸까요.”

 

 

“제 앞의 조물주께서는 오직 인간만을 창조하지 않으셨죠. 모두 신의 순서대로.

아, 당신은 선과 악을 구분하면서도 숭배할 인간을 찾지 않으셨군요.

아직. 아직 찾지 못하신 거지요, 당신을 충분히 숭상할 사람을.”

 

 

한니발은 대답이 없었으나 그의 눈은 희열로 가득했다. 그와 수만 번의 같은 심상을 거친 윌의 눈을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신은 자신과 가장 유사한 모습으로 인류를 창조했다. 윌은, 한니발에게 처음으로 진솔하게 수면 위로 드러난, 그와 가까운 존재였다. 한니발은 감명받은 눈으로 자신에게 누구보다 가까이 접촉한 사람을 오랫동안 주시했다. 그의 눈이 빛났다.

 

 

“윌, 제가 당신을 그려도 될까요.”

 

 

한니발은 견디지 못할 쾌감에 홀린 듯한 윌의 눈에 자신의 것을 닿도록 했다. 그의 것 또한 홀려있었다. 자신의 아담에. 자신과 가장 가까운 신의 피조물에. 자신의 세계 속 유일한 인간에게. 한니발은 윌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는 윌을 갈망했다. 어쩌면 소유욕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윌은 한니발의 욕망이었다. 그가 점서한 미래의 빛나는, 유일한 아담. 자신과 가장 비슷한 존재.

 

입 밖으로 빠져나간 음성이 공기를 메웠다. 아무 행위조차 없었던 공간이 농염한 공기로 찰 때까지. 삿된 눈맞춤이 성스러워질 때까지. 한니발의 손가락이 윌의 정맥 위를 쓸었다. 거친 숨을 뱉는 윌의 눈에는 흥분이 가득했다. 한니발에게 완전히 동화된 그는 벅찬 듯이 상대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분위기에 취한 것일지도 몰랐으나, 그 행위가 한니발에게는 그 어떤 예술의 순간보다 가치 있는 순간이었으리라.

 

“당신을 묶어도 되겠습니까.”

 

 

윌은 당신의 영감이 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구태여 죽음이라도 감당할 확신이었다. 한니발은 그의 작업실이라는, 저택 뒤편에 작게 자리하여 사방이 투명한 방으로 윌을 이끌었다. 천장이 이 층 높이는 족히 될 작업실의 중심에 긴 봉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한니발은 윌의 셔츠 옷깃을 쥐더니 단추를 하나둘씩 풀어내었다. 윌이 셔츠 안에 얇은 면티를 입었다는 것을 예상한 것처럼 그의 몸 위로 손가락을 쓸었다. 윌은 투명한 통유리창으로 따갑게 들어온 햇빛에 취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얇은 밧줄이 윌의 목부터 허리, 팔과 다리를 봉에 고정했다. 봉에서 네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한니발이 메스를 잡아 들었다. 놀란 것을 티 내지 않으려는 윌에 한니발은 단지 연필을 깎는 것이라 웃었다. 그리고는 윌의 얇은 면 상의 위로 날카롭게 깎은 연필을 가져가 대었다. 목 위 선부터 쇄골 아래를 따라 차례로 그어지는 연필심에 윌은 입술을 물었다.

 

흰 바탕 위에 선이 나타났다. 바로 피를 쓰지는 않습니다, 낭비를 원하지 않아요. 연필로 그은 스케치 부근에 자리한 근육들에 힘이 들어갔다. 빨라진 심장 박동에 윌은 가쁜 숨을 쉬며 연신 손가락을 움찔댔다. 그럴 뿐만 아니라 한니발이 몸을 더 잘 보이게 할 심산으로 셔츠 위로 조금씩 부은 따뜻한 물이 점점 식으며 윌을 떨도록 만들었다. 이가 흥분으로 인한 것일지 낮아진 신열로 인할 것일지, 구분하지 못한 채 가쁜 숨을 쉬며 한니발을 올려다보는 윌에게 돌아온 것은 경이로운 미소였다. 빨리 부어오르는 피부와 옅은 고통을 감내하는 모습이 한니발에게는 아름다움이 아닐 수 없었다. 제 목숨을 뜯어서라도 그를 완전한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집착이 자리 잡을 만큼.

 

한니발이 건넨 부드러운 침의를 받고,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나와, 태초의 상태처럼 나체인 윌에게 보인 것은 깎은 연필이 남긴, 부어오른 몸의 선이었다. 거울 속에 비쳐 보이는 자신의 몸은 스케치의 일부였다. 근육을 따라 자리한 곡선은 더이상 뾰족한 끝부분이 만들어낸 옅은 상처가 아니었다. 윌은 자신이 이미 예술의 일부임을 알고 있었다. 한니발이 지난 반나절의 흔적을 담아 건넨 종이의 여러 스케치를 따라 몸을 움직여 고정한다. 하나같이 열려버린 표정에 윌은 잠을 쉽게 이루지 못했다. 윌은 한니발이 마련한 침실에서 벗어나 밝을 때 찾았던 작업실로 걸어갔다. 맨몸에 가운만 걸친 상태였다. 윌은 한니발이 집었던 메스를 제 목에, 가슴에, 허벅지에 대어 보았다. 살갗을 눌렀다가 떼고는 앞서 제 몸에 새기어진 수많은 스케치를 다시 상기한다. 그는 이미 예술의 일부였다. 밝은 달빛이 통유리의 작업실을 훤히 비추는 아래 윌은 마음먹는다. 스스로 단언하여 삼킨다.

 

 

 

그 밤 윌은 자신의 심장을 꺼내어 검은 태양에게 바치는 꿈을 꾼다.

 

 

 

 

***

 

 

 

 

나의 아담, 내가 구원할 생명, 내가 선사할 광명의 일각.

나의 윌.

 

 

윌이 아니면 되지 않는다. 윌이 자신 앞의 유일하게 온전한 존재이며 천국으로 향할 문이 있는 존재이므로. 한니발은 문을 보았다. 그는 그 문을 열어주어야 했다. 윌이어야 했다. 캔버스 안의 완전한 존재로, 자신의 마인드 팰래스 속에서 윌은 영생을 얻을 것이다. 구원받을 것이다.

더는 금수들 사이에서 고통받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사명이자 윌의 편지를 받았을 때부터의 의무였다.

 

윌, 제 피조물이 되어주시겠습니까.

제 유토피아에, 그리고 제 에덴동산에.

담겨주시겠습니까.

 

허락이 아니다. 간곡한 부탁이었다.

절 설계해줘요. 절 완전하게, 당신의 창조물로 승화해 줘요.

이 세상에서 구원해줘요.

 

마지막 어절이 윌의 입 밖으로 빠져나간 순간으로 그는 소리 없이 탄성을 뱉었다. 오랫동안 투명한 물이었던 윌에 한니발이 풀어버린 붉은 물감이 확산되는 심상. 윌은 야후의 세계에서 누리느니 신의 손에 짓이겨질 작은 풀꽃이 되겠다고 했다. 한니발은 찢기는듯한 고통과 함께 자신의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황홀경에 사로잡혔다.

양이 제 발로 제단 위에 오른다. 하얀 털이 검붉게 물들어간다. 말린 뿔이 거센 파도에 펴진다. 광활한 파도 위 뇌우같이, 윌의 속박된 맹신 아래 예술가가 물감을 준비한다.

 

윌은 고개를 끄덕였다. 온전한 상태로. 태초와 같은 모습으로. 한니발은 성스러운 표정으로 윌의 팔을 잡아 봉에 고정했다. 몸부림칠 수 없는 구조, 그러나 양은 저항하지 않는다. 윌은 달콤한 꽃의 향기를 상기한다. 붉은 장미, 보드라운 꽃잎, 홀린 눈은 한니발의 것과 같았다.

 

메스가 살갗에 닿으며 차가운 고통이 윌을 감싸온다. 일그러진 얼굴에는 아름다움과 고통이 진하게 묻어났다.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에는 검붉은 액체가 떨어져 반짝였다. 햇빛을 받아 화사한 정원에서 몸이 묶인 하나의 존재가 나지막이 예술의 일부가 되고 있었다. 황홀경에 사로잡힌 눈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떨어지는 아래 울컥거리며 흐르는 붉은 물감이 윌의 곡선을 타고 흘렀다. 흰 배경 아래 나신이라 더욱 돋보이던, 힘이 들어가 경직된 근육을 따라 형체를 공고히 했다. 말려 들어가는 상처 부위가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신열이 오르는 것인지 화닥화닥한 목구멍에서는 밀려들어 오는 고통에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오직 눈물만 흐를 뿐이지 저항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 자리에서 차가운 메스가 또 다른 선을 만들어 낼 때, 수명의 시간이 급격히 줄어들 때, 윌에게 명줄에 달린 미련 따위는 흩날리는 먼지만큼이라도 남지 않았다. 그는 이미 신에게 손을 내밀었으므로. 붙잡고 놓지 않을 것이므로.

 

정해진 숙명같이 에워싸고는 천사들이 귓등에 비명을 지름을 받아들였다. 윌은 애원하는 눈빛으로 한니발을 바라보았다. 제 파멸을 탐미적인 눈빛으로 바라보며 목에 가로로 쇳덩어리를 긋는 한니발을. 하찮은 인류의 도구로 신의 영역인 목숨을 빼내는 일을. 그는 탐했다. 윌의 생명줄을 맛보았다.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윌의 숨통을 핥았다. 아름다워요, 윌. 제가 당신에게 바랐던 모든 것입니다. 윌은 한순간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막혀 떨어지는 음성들은 모두 한니발을 위한 최후의 찬가였다.

 

흐릿한 시야 앞에 누군가가 손을 뻗는다. 감동의 물결로 떨어지는 눈물이 부드러운 손 위로 떨어진다. 쉰 목소리는 또 하나의 미술 도구였을 뿐이었다. 단 하나 오직 눈물만으로 젖은 얼굴이 다른 부위에 비교하여 깨끗했다. 빈 곳이라는, 창조를 가능케 하는 그 위치가 한니발에게 흥분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눈을 감은 그 얼굴에 따가운 햇빛이 들어 물방울이 크리스털처럼 반짝였다. 제가, 제가 당신을 구원했어요, 윌. 한니발은 윌의 입에 자신의 숨을 불어넣었다. 턱에 닿는 숨을 쉬며 숨덩어리를 받아들이는 윌은, 묶인 팔을 떨어 자신이 지탱된 봉까지 진동을 전달했다. 닫히지 않는 입에서 잔뜩 엉킨 음성이 튀어나온다, 감정과 함께 쏟아진다. 발버둥 치며 피 섞인 타액이 흐른다. 원망의 소리는 없다. 분명한 감사의 화답이다. 제게 보인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흰 가죽의 캔버스에 치명적인 상처가 남는다. 나신인 윌의 몸에 붉은 붓 터치가 가득하다. 심장 박동과 일치하는 물감의 폭포가 온몸을 적신다. 그는 윌의 명을 자신의 캔버스로 옮겼다. 아버지, 왜 제게 시련을 내리시나이까. 날갯죽지에서 붉게 갈리는 날갯짓은 바닥으로 떨어져 튀어 올랐다. 한니발은 윌을 온전히 구원하려, 자신의 완벽한 피조물로 만들고 있었다. 광기가 서린 눈은 더는 붓터치와 찢긴 상처를 구분하지 못했다. 예술과 행위를 분간하지 못했다.

 

속박된 봉에 울림을 가하던 팔의 움직임이 점점 멎는다. 말단이 옅게 떨린다. 푸른 눈동자에 보석이 박혀 벌린 입으로 흐른다. 진하게 고인 바닥의 검붉은 물감 위로 떨어져 희석해간다.

아아, 한 떨기 붉은 장미가 시들어 간다. 수분기를 잃고 말라간다. 후각과 시각이 모두 저릿하다. 매번 마지막이 될 숨을 뱉는다. 구원의 조물주에게 고정되었던 눈에서 초점이 사라진다. 붓터치를 따라가지 못한다. 목을 긁는 힘겨운 숨소리가 사그라진다. 강렬히 치닫는 한니발이라는 광풍에 윌의 생명이 점멸하여 간다.

 

 

최종적으로, 그의 처절한 몸부림은 탐미적인 존재의 손에서 부활했다. 성스러운 햇빛만이 고요한 작업실에 굉음을 일도록 하였으며, 그 안에는 순간이라도 놓칠까 봐 평소보다 동공이 확장된 채 손을 놀리는 한 사람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팔레트는 필요하지 않았다. 윌이 밟던, 검붉은 물감이 흐르는 대리석 바닥만이 그의 팔레트였을 뿐이다. 윌의 몸이 그의 캔버스였다. 그는 한니발의 뮤즈였다. 에덴의 아담이었다. 고귀한 조물주는 진정으로 죽음을 담았으며 그 죽음은 아름다움을 위한 제단의 양과 같았다. 부활을 이끈 창조주는 마침내 제 피조물에 눈을 떴다. 거룩한 홍수같이 눈물이 흐르며 그는, 기쁨의 탄성을 토해냈다. 자신이 추구할 수 있었던 모든 아름다움의 탄생과 죽음이 겹친 순간이었다.

 

 

 

***

 

 

 

 

과연 그 존재는 양이었을까. 아담이었을까. 박수갈채 같던 황혼 뒤에는 피칠갑이 된 숲의 절규와 원망 같은 푸른 바람 소리와- 역겹도록 비릿한 향이 진동하는 그의 작업실만 남았을 뿐이다. 검은 태양이 떠오른다. 그제야 한니발은 깨달았다. 깨달아야만 했다.

 

아, 그는 찬가에 어울리는가? 아니다. 그는 신이 아니었다. 신에게 범접하려다 유일한 양까지 놓쳐버린 아둔한 인간이었다. 그는 결국 야만적인 인간이었다. 그가 혐오한 다른 모든 존재와 같이. 쇳덩이가 야수의 목을 끊는다. 비틀거리더니 이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제단 위 흥건히 늘어진 양 위에 몸을 포갠다. 찢어진 장미와 함께 붉게, 그렇게 젖는다.

© 2020 September Hannibal Collaboration Project Blood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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